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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치유를 시도하는 국어수업이 필요한 이유

인강 2023. 6. 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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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학급에서 모둠으로, 모둠을 지나 개인으로 

 

 

 

먼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간략하게 좀 정리를 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 전제를 우리가 공유하지 않으면 오늘 저의 이야기가 사실 먼 얘기처럼 들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가 먼저 가져온 사진은 학생 수 감소 그래프입니다. 어마어마하죠. 한때 800900만에 육박했던 그 숫자였는데 지금은 이것의 절반이고요, 10년이 지나면 3분의 1이 더 사라지는 상황입니다.

1천만에 가깝던 그 시절에는 경쟁식 수업이 가능했죠. 그리고 사실은 그거 외에는 방법이 없었죠. 의자 뺏기 놀이랑 비슷한 거죠. 의자는 정해져 있고 의자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경쟁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공정함이었죠.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데 시대가 너무 달라졌습니다. 좀 거칠게 예를 들면, 10명 중에 3명을 뽑던 시대에서, 3명 중에 3명을 뽑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죠. 그래서 예전에는 학생들을 그룹화해해서 그룹에 맞는 수업을 따로 이렇게 하는 것도 대단히 선진적이고 학생 중심 수업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앞으로 다가오는 10년 안에는 학생들을 그룹별로 하는 게 아니라 이젠 정말 학생 개개인별로 맞춤식 어떤 수업을 교육을 배움을 진행해야 되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나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정말 이거는 공교육이 시작된 이래도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지요. 학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교를 둘러싼 기술과 문화의 상황이 바뀌었어요.

 

두 번째는 학생들의 개인화, 개별화에 대한 요구가 더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가 학생 개인에게 맞춤형 교육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더더욱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게 제도적으로는 고교 선택제로 다가오고 있지요. 고교 선택제의 핵심 아이디어 중 하나는 5일 중에 하루, 오전 학교 수업 후 오후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취향에 따라, 진로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수업을 듣는 것이죠. 학생들의 동기와 계기만 튼실하다면 이렇게 진행할 수 있는 수업의 넓이와 깊이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1개 학교에서는 불가능했던 수업이 전국 단위에서는 20명 이상 인원을 채우기만 하면 얼마든지 개설할 수 있지요. 시간의 한계도, 공간의 한계도, 주제의 한계도, 교과의 한계도 사라지죠.

이것이 제도적으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정착할지를 예상할 수 있는 깜냥이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교사로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제가 여기는 것은, 개인이 학습의 시공간을 선택하는 시대, 혹은 그게 가능한 시대가 됐다는 거예요. 문화로도, 기술로도 그것을 요구하며 가능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가 학생들의 시공간을 정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얘들아 몇 시까지 학교 가야 돼, 얘들아 이 시간까지 공부를 해야 돼, 이 시간에 쉬는 거야, 그리고 넌 이쯤이 되면 집에 가야 돼”, 이게 아니고, 앞으로 날이 갈수록, 학생 개인이 내가 이 시간에 이런 공부를 할 거야, 이곳에서 할 거야, 이런 주제로 할 거야, 이렇게 깊이 넓게 할 거야라고 정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사들은 여기에 어떻게든 대응을 해야 되는 상황이 오고 있다는 것이죠. 왜냐고요? 이젠 그게 가능해 졌으니까요..

 

 

1.5 배속 문화는 수능이 원하는 시스템
1.5 배속 문화는 수능이 원하는 시스템

 

 

2. 1.5배속 문화는 수능이 원하는 시스템

이런 얘기를 하면 당장 수능은 어떻게 하냐, 정시는 어떻게 하냐, 이런 말씀을 하시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으시죠. 충분히 공감합니다. 문제는, 수능이라는 시스템 자체에서부터 이런 요구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거죠. 학생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효과와 효율을 요구하는 것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수능 체제 안에서의 학습이라는 건 짧은 시간 안에 누가 더 정확하게 정보를 찾아내느냐이것들을 잘하는 학생들을 우리는 공부를 잘한다고 하죠. 그래서 공부를 잘하려면 그걸 연습해야 돼요. 긴 글을 빠른 시간 안에 읽고, 정보를 정확하게 찾는 걸 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학생들에게 긴 글을 읽어라, 독서를 해라, 독서를 해야 인지력도 높아지고 읽기 속도도 높아지고, 낯선 주제 낯선 개념 낯선 낱말에도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단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수능이란 것이 그런 아이들이 뛰어나다고 인정받게 하는 그런 시스템이잖아요. 수능 체제가 20여 년 동안 지속되면서 개인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공부에 대한 요구가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여기에 같이 보았으면 하는 것은 학생들의 학습 방법입니다. 이 그래프를 보시면 독서율의 변화 그래프인데요, 지난 20여 년간의 데이터를 봐도 중등 학생들의 독서율은 낮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학생들은 늘 책을 많이 읽어왔고 지금도 책을 많이 읽어요. 문제는 고등학교를 딱 졸업하자마자 성인들의 독서율이 뚝뚝뚝뚝뚝 떨어지는 거죠. 근데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자세히 봐야 될 현상은 뭐냐면 전자책과 오디오 북을 읽는 사례가 굉장히 많이 늘었다는 거죠. 전자책과 오디오 북은 언뜻 들으시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거거든요. 전자책으로 책을 구입하시면 이 패드가 그 책을 읽어줍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 20대들은 책을 어떻게 읽냐면 읽는 것이 아니고 듣습니다. 버스 타고 다니면서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설거지하면서 산책하면서 책을 들어요.

 

 

 

여기서 또 하나 우리가 고민해야 될 건 뭐냐면 속도인데요. 2020년에 굉장히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어요. 지금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 사건이었는데, 넷플릭스가 안드로이드 앱에서 영상 재생 속도를 0.5배에 1.5배속까지 조절하는 기능을 정식으로 출시합니다. 이 당시에 영상 컨텐츠 제작자들의 대부분이 반대했어요. 대표적으로는 배트맨 다크나이트, 인셉션 등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있죠. 그들은 이러면 안 된다, 연출자들이 만든 속도, 그 속도에도 다 의미가 있고 의도가 있는데 이 속도를 시청자가 마음대로 조절하게 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저항했는데, 넷플릭스에서 그걸 거절했죠. 그들의 답은 간결했습니다. “우리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지향한다.”

여러분들도 유튜브 많이 보시죠? 재미있게도, 요즘 유튜브의 최장시간 시청 계층은 10대 이하와 60대 이상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전반적으로 시청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고요. 그것에 대비하여 기존의 방송사들의 시청률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고, 그와 더불어 광고시장은 급격히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를 시청하는 문화를 보면, 요즘 학생들 1배속으로 보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요. 보통은 1.25 1.5배속으로 보고, 조금 빠르다 싶으면 1.75로 봅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속도까지 조절이 가능하고 그것에 익숙한 것이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문제가 발생합니다. 학생들 입장에서 교사의 설명이 너무 느린 거예요. 학생들의 상당수가 교사의 설명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 있는데, 선생님의 설명은 너무 느린 거예요. 진짜 문제는 뭐냐, 그걸 안다고 해도, 교사는 자신의 말하기 속도를 2배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교사만의 문제가 아니고, 어떠한 사람도 자기 말의 속도를 두 배 스피드 부스터를 해서, 그것도 그 상태로 45분 동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진짜 정말 큰 문제는 이렇게 되다 보니까, 학생들마다 요구하는 속도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1.2에서 혹은 더 늦게 해서 0.85로도 원하는 학생들이 있고요, 어떤 학생들은 1.5도 느려요. 교사가 이걸 어떻게 다 일일이 맞추냐는 거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교사의 속도에 학생들이 맞추도록 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정말 있을까요?

 

 

3. 교과서가 불가능한 시대에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거기에다가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이겁니다. 이게 뭐냐면 제가 온라인에서 돌아다니는 걸 가져왔는데요, 꼰대예요. 꼰대의 육하 원칙인데 WHO. 내가 누군지 알아? 네 꼰대죠. WHAT. 니가 뭘 안다고? 네 꼰대입니다. WHERE. 어딜 감히? 네 꼰대고요, WHEN. 내가 예전에 말이야.. 꼰대고요 HOW. 어떻게 나한테 니가? 이거 꼰대고요 WHY. 내가 그걸 왜 해? 이게 꼰대입니다.

물론 꼰대라고 불리는 일종의 권위주의. 일방적인 권위주의가 비난 받는 것에는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꼰대를 비난하는 문화 현상 안에는, ‘집단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집단을 향한 발언에 대한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거부감이 폭력에 대한 거부감과 뒤섞여 있는 것 같아요. 특히나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이건 굉장히 강한 것 같고, 많은 세대들에게 이것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얻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개인의 인권과 개인의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시대적인 흐름이 이러한 문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출산율의 저하라는 물리적 환경이 개인의 권리를 보다 강화하는 문화를 더 강력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고요. 개인의 수가 절반 이하로 줄고, 개인에 대한 권리는 더 강화되고, 그러다 보니 집단의 압력, 집단의 요구, 집단의 필요에 대해서는 조금은 더 거리를 두고, 경계를 하고, 좀 밀쳐내는 그런 것이 훨씬 강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아니고요, 문제는 교사로서 우리에게 이런 게 생겼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교사가 하려는 교육활동은 대부분, 꼰대로 여겨질 만한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죠.

 

 

 

 

 

꼰대 5계명

WHO.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선생님이야. 넌 학생이고.

WHAT. 니가 뭘 안다고? 이게 교과서야. 넌 모르니까 배워야 하고.

WHERE. 어딜 감히? 나 선생님이야. 넌 학생이고.

WHEN. 내가 예전에 말이야... 나 승리자야. (공부는, 경쟁은 이렇게 하는 거야.)

HOW. 어떻게 나한테 니가? 나 선생님이야. 넌 학생이고.

WHY. 내가 그걸 왜? 나 선생님이야.

 

학교에서 교사는 교사입니다. 학생은 학생이고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구분이 명확하게 있습니다. 아무리 학생을 존중하고, 학생을 중심에 두고, 학생을 돕는다고 해도, 학생이 학생의 자리에, 교사가 교사의 권위에 위치하는 것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교사는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배움이란 늘 즐겁고 신나고 익숙할 수 없기 때문이죠. 배움이란 괴롭고, 힘들고, 낯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힘든 시작을, 힘든 과정을, 견디고 멈추고 고민하고 지나와야 마침내 이르는 배움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배움을 전하려는 교사의 권위가 꼰대의 양식과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다르지가 않아서, 교사의 권위는 늘 의심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사를 너무도 가혹하게 지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꼰대를 방지하기 위한 5계명이 또 돌아다니더라고요.

 

 

 

 

 

꼰대 방지 5계명

1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2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3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4 말하지 말고 들어라. 답하지 말고 물어라.

5 존경은 권리가 아니라 성취다.

 

이 다섯 가지의 태도 혹은 계명이 내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계명이라고 합니다. 저는 대부분 동의를 하는데 문제는 뭐냐면, 이 계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면요, 이제 교과서로 수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교과서란 틀리면 안됩니다. 교과서는 바뀔 수 있는 존재여서는 안되고, 바뀌어야 할 것은 학생이어야 합니다. 교과서는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아야 합니다.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말하고 말하고 말하는 것이고, 어떤 질문에도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존경은 교과서에 이미 부여되어 있어야 하죠.

그런데 이것이 꼰대를 거부하는 문화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교과서가 불가능한 시대라는 것이죠. 적어도 예전의 권위는 불가능한 시대라는 것이죠. 최소한, 우리가, 교사들이 학창시절을 지나오며, 교사로 성장하며 인정하고 존중하고 존경했던 학교와 교사와 교과서의 권위는 아닌 것입니다. 그때만큼의 인정과 존중과 존경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제 블로그에 올렸더니 제가 존경하는 블로거님이 아래의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콘텐츠 소비자의 권리가 강화된 시대에 교육 분야는 여전히 일방적이군요.”

 

이 댓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지만 제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이거였어요. “학교는 여전히 일방적이군요.” 그래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학교는 일방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교육이 일방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교육이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면,

교육은 어디까지 일방적이어야 교육적인 것일까?

 

질문은 쉽죠. 비판은 쉽죠. 비난은 더 쉬워요. 늘 어려운 것은 해결입니다. 이게 정말 교육 현장에서 답을 만들어가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어려운 일이죠. 정말 궁금합니다. 교과서가 불가능한 시대에,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정리하겠습니다.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개인과 개인의 대화를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이 1 1로 직접 만나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못 느끼시더라도 지금보다도 학생수가 평균적으로 25%가 줄고 나면, 그래서 내 교실에 있는 학생 수가 20명이 되고, 15명이 되고, 10명이 되면 피할 수 없는 고민이 되실 거에요. 교실에 있는 학생 수가 10명인데, 학생 수가 50명일 때랑 똑같이 수업을 하고 있다면, 그건 뭔가 좀 잘못된 거죠. 그리고 상황도, 문화도, 기술도, 환경도 모두 다르고요.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더,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은 점점 더 교과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죠. 학생들이 다양한 내용과 속도를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이죠. 문화와 기술이 그것을 옹호하고 권장하며 촉진하는 시대라는 것이죠. 대체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속도에 맞춰서, 학생들의 취향에 맞춰서, 어떻게 하면 이 학생들과 1 1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학생들의 자존과 치유와 성장과 성숙을 이끌어 내는, 그런 수업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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