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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맛집

‘민중의 평화’를 가르치는 고전 교육 _ 이계삼

by 인강 2011.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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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1)

출처 구름배 | 구름배
원문 http://blog.naver.com/wintertree91/10023302122

우리가 서로 얼굴 보며 만나 이야기한 지는 몇 년이 되었지만

그 얼굴빛과 표정과 느낌을 잊지 않는다,

마음으로 내가 흠모하는 벗, 이계삼 선생이 새로 쓴 글을

<함께여는 국어교육> 2007년 9-10월호에서 보았다.

 

교육방송에서 논술 강의를 하며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는 후배에게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모의고사 문제를 내러가며 바쁜 티가 풀풀 나는 후배에게

입시문제집 원고를 쓰며 삶의 성취를 느끼는 몇 분 선배에게

그래서 세상에 무엇인가 이루고 산다고 스스로 여기는 아는 이들에게

이런 글을 써야, 글 배운 자로서 제 몫을 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싶다.

 

내 옆자리에 앉은 다울 선생은 이 글을 보고 '울타리를 넘는 글이군' 하고 평을 했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 갸우뚱하며 눈에 힘을 주고 하면서

글 읽는 사람이 생각에 잠기는, 이런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 구름배

 

 

:::

 

‘민중의 평화’를 가르치는 고전 교육

 

이계삼 / 경남 밀성고등학교 국어교사 ygs0720@hanmail.net

 

 

1.

저는 고전문학 교육을 둘러싼 몇 가지 습속 혹은 인식의 착각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저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러 맥락을 잘못 짚은 데가 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비슷하겠지만, 저 또한 교사가 되기 전에 고전 작품을 공부할 때는 이것이 담고 있는 깊고 그윽한 맛을 아이들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혼자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낭만적인 기대는 교단에 처음 섰을 때부터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고전 작품이라면 일단 어렵고 재미없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고전 작품들과 아이들 사이에는 실로 두터운 장벽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이기도 하고, 문화와 가치의 장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전 교육은 대개 이 장벽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론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이 발행하는 <함께 여는 국어교육>이나 인터넷 자료실에는 고전 작품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더 재미있고 덜 지루하게 가르치려는 현장 교사들의 열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고전 아카데미와 같은 연수 자리도 적잖게 펼쳐집니다.

저는 이런 노력들을 지켜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속에 뭔가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고전 작품을 왜 가르치는 것인가, 조금 썰렁하게는 “고전 작품을 배워서 어디에다 써먹을까?”라는 식의, 고전 작품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입니다. 물론 고전 작품은 입시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하기 때문에 분명한 현실적인 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 작품을 가르치는 것은 문화의 전수자로서 교사의 당연한 책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은 “아이들의 삶을 위해서”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들의 삶을 위해 고전 작품을 가르쳐야 한다면, 우리는 “고전 작품과 아이들의 삶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일견 당연해보이는 질문이지만, 너무 자명해서인지, 질문의 상투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의 삶’과 고전 교육을 연관 짓는 흐름은 매우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2.

언젠가 학급 단합 행사를 마치고 아이들의 채근에 못 이겨 함께 노래방을 갔다가 어떤 노래를 유심히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마야’(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아주 ‘파워풀하게’ 부르기도 했던)라는 가수가 부른 <나를 외치다>라는 노래였습니다. 제가 그 노래를 유심히 들었던 것은 아이가 그 노래를 아주 멋지게 부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선율이 몹시 절절했고, 그 노랫말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절규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오는 소리 눈을 비비고 일어나 / 곁에 잠든 너의 얼굴 보면서 / 힘을 내야지 절대 쓰러질 순 없어 /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꿈도 꾸었었지 뜨거웠던 가슴으로 / 하지만 시간이 나를 버린 걸까 / 두근거리는 나의 심장은 아직도 이렇게 뛰는데

 절대로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 뒤쳐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oh~ / 지금 이 순간 끝이 아니리라 /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외치면 돼

 지쳐버린 어깨, 거울 속에 비친 내가 / 어쩌면 이렇게 초라해 보일까 /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공간에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 끝은 있는 걸까 시작뿐인 내 인생에 / 걱정이 앞서는 건 또 왜일까 / 강해지자고 뒤돌아보지 말자고 앞만 보고 달려가자고 … (후략)

 

저는 절정 부분에서 터져나오는 절규, ‘절대로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뒤처지면 안된다는 말 대신’하는 부분이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강해지자고, 뒤돌아 보지 말자고, 앞만 보고 달려가자고’ 하는 부분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건 아주 ‘근대적’이고 또한 ‘한국적’인 절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노래의 화자는 왜 이렇게 결연한 걸까요? 제 아이를 잘 돌보기 위해, 혹은 조기 축구 경기를 앞두고 이렇게 결연하게 다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가 한미 FTA 반대 투쟁이나 비정규직 투쟁에 참여하는 이들의 내면의 다짐일 수는 있을까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지쳐버린 어깨, 거울 속에 비친 내가 어쩌면 이렇게 초라해 보일까”하는 구절에서 나르시시즘의 흔적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요컨대, 이 노래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 경쟁에 내던져진 이들의 내면입니다. 그것은 가깝게는 입시를 앞둔 우리나라 고등학생이기도 하고, 취업과 고시, 비즈니스 실적을 위해 몸부림치는 도회인들의 내면 풍경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이상의 시 <오감도-시 제1호>와 <거울>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1930년대 식민지의 수도 경성에서 근대의 우울과 좌절을 선구적으로 체득한 이상이 <오감도>에서 터뜨리는 나약한 절규―무섭다고 그리오―보다 훨씬 더 전투적이고 또 맹목적입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고, 우리들 삶이 더 강퍅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노래에는 <오감도>에 깃든 우울과 인간적인 번민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울>에서 느껴지는 자기 응시와 분열의 아픔, 화해에 대한 갈망에 비하자면 이 노래에는 훨씬 더 격조 없는 나르시시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며 몹시 불편했고,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전투적인 서정, 턱없는 결연함, 맹목은 누그러뜨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다른 삶의 방식을 향한 출구를 열어젖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전 교육이 왜 필요한가, 묻는다면 저는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위해, 혹은 다른 삶을 향한 출구를 찾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3.

제가 고전 교육에 대해 갖고 있었던 원천적인 불만은 제재 선정에 어떤 가치론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전문학 교과서는 다들 아시다시피 지식인들이 남긴 작품이 주종을 이룹니다. 고등학교 18종 문학교과서에 실린 고전 작품 목록을 일별해 봐도 이 점은 분명해집니다. 수많은 구비전승들이 문자로 정착되지 못했고, 토착 민중문화에 대한 연구가 그다지 진척돼 있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고전 작품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주로 지식인의 미감에 치중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지금과 같은 고전 교육을 통해 그 당대인들의 삶과 정서의 실감을 재구(再構)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특히나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고전 작품들의 상당수는 지식인 문인들의 공적인 삶을 다룬 영역입니다. 은거하는 재지(在地) 사림이 자연속에서 풍류를 노래하더라도 거기에는 정치적인 긴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충신연주지사의 계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정서의 <정과정>과 조위의 <만분가>, 그리고 정철의 <사미인곡>,<속미인곡>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이런 작품을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작품들은 결국 개인적인 신원(伸寃)의 노래입니다. 충신연주지사라고 하지만, 가르치는 저 자신조차도 그들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작품들에는 살벌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쟁투가 깔려있고, 그래서 몹시 무섭고 표독한 노래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작품들도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작품들 일변도로 가르쳐짐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입니다.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구획되고, 상징과 비유는 언제나 정치적 맥락으로 대입됩니다. 이를테면, 고전 시가에서 ‘님’은 언제나 ‘왕’이고, ‘구름’은 언제나 임금의 총기를 가리는 반대편 당파이며, ‘자연’은 그 자체로 조화로운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인륜의 질서가 덧씌워진 존재로 이해됩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러운 생활의 실감에 바탕한 개인적인 감각은 항상 공식적인 가치에 비해 열등하고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근대 이전의 삶이 공적․정치적 긴장으로 가득했던 것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이 비록 문자로 기록된 지식인 문인들의 작품세계의 대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근대 이전의 삶이 이러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식인 문인이더라도, 한 인간으로서의 구체적 삶의 실감이 담긴 작품들도 같은 무게로 가르쳐져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연암 박지원의 <큰누님 박씨 묘지명>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연암이 마흔 셋 나이에 남편과 두 자식을 남기고 죽은 큰누님의 가족들이 결국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배를 타고 산골로 떠나는 것을 전송하는 감회를 담은 것입니다. 

……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에 얼굴을 단장하시던 일이 마치 엊그제 같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건방스럽게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다가 새 신랑의 말을 흉내 내 더듬더듬 정중하게 말을 하니, 누님은 그 말에 부끄러워하며 빗을 그만 내 이마에 떨어뜨렸다. 나는 골이 나 울면서 분에다 먹을 섞고 침을 발라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으로 만든 자그만 오리 모양의 노리개와 금으로 만든 벌 모양의 노리개를 꺼내 나를 달래며 울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스물 여덟해 전의 일이다.

…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 때에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사이에 늘 이별과 근심, 가난이 떠나지 않아 꿈결처럼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형제와 함께 지낸 날은 어찌 그리도 짧은지. (후략)

 

참으로 아름답고 슬픈, 한 폭의 그림입니다. 연암은 죽은 누님을 이를테면 학식이 높았고, 현숙했고, 자식 교육에 헌신적이었다는 식의 ‘공식적인 언어로’ 추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대부 집안의 학자인 자신을 여덟 살배기 어린 아이로 되돌려놓고, 그때 느꼈던 누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아주 구체적이고 절제된 묘사를 통해 그립니다. 그리고 사랑의 추억과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 결국 헤어져야 하는 슬픔을 그립니다. 연암과 같은 대사상가에게서 느껴지는 이 다감하고 진솔한 감정은 그의 대가스러움을 더해주는 장식이 아니라, 고전 작품이 현대인에게 주는 보편적인 감동의 한 원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런 삶에 대한 보편적 실감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작품들이 적잖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전문학 교과서는 그 반대편의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으로 해석될 지식인 문인들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고전 교육과 관련하여 제가 품고 있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문학은 진보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입니다. 문학사는 대개 구비전승으로부터 기록 문학으로, 고전적 양식에서 현대적 양식으로, 토착민들로부터 전문 예인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입니다. 이를테면 고전 문학사에서 민중 연희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을 보면, 북청사자놀음, 하회별신굿놀이처럼 특정 지역의 ‘부락제’로부터 고성 오광대와 같은 ‘들놀음’을 거쳐 봉산탈춤과 같은 상업적 시정(市井) 공간에서 벌어진 놀음으로 ‘발전’ ‘진보’했다는 식의 서술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연극적 요소가 화려한 방식으로 강화되어졌다고 해서, 혹은 그 내용이 다채로워지고, 배우들이 부락 토착민에서 전문적인 놀이꾼으로 변모했다고 해서 그것이 ‘발전’이고 ‘진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 발전 과정 속에서 놀이판의 주체였던 대중이 ‘구경꾼’으로 ‘소비자’로 전락함으로써 대중의 ‘소외’와 ‘균열’이 더 깊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저는 내용적으로 소박하고 형식적으로도 다채롭지 못할지라도, 생산자 대중 자신들이 직접 자신들의 생활의 실감을 표현한 부락 연희가 더 가치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록문학보다는 구비 전승이, 전문인들보다는 토착민들의 작품이 더 가치롭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근대의 삶속에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희소한 것’을 존중하는 것은 오로지 근대적인 관념입니다. 우리는 고전 작품에도 문학적으로 높은 표현력을 가진 수사, 개성적이고 기발한 발상, 시공간적 스케일의 규모를 숭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적인 시선입니다. 수사적으로 범용하고 보편적인 발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묻어 있는 삶의 실감을 더 가치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문학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의해서 언제나 ‘반복’되는 것입니다.

 

4.

이 모든 것을 아울러서, 우리 고전 교육이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이나 모두 근대 이전의 삶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근대 문명을 대체로 긍정합니다. 근대적 삶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생각하는 뿌리 깊은 관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문학자로 손꼽히는 분들의 발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국론을 폐기하고 중세적 안빈론(安貧論)으로 복귀하자는 일부의 주장은 아름답지만 공상적이다.

 - 최원식, <세계 체제의 바깥은 없다>, <<창작과 비평>> 1998년 여름호.

 

아까 미개사회 얘기를 하셨는데, 그런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떠나서, 내가 욕망의 교육이 잘못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죽으나 사나 이 판에 머물면서 좀 더 사람답게 살다가 갔으면 싶을 뿐이고 그것을 위해서 그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자는 생각이지, 그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욕망의 축소가 너무 심하다고 봐요. 거짓 욕망과 뒤섞여 있는 가운데서도 인간이 긴 역사를 통해 더 큰 것을 욕망하고 인식하는 것을 배워왔는데 이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백낙청, <대담-생태계의 위기와 민족 미주 운동의 사상>에서, <<창작과 비평>> 1990년 겨울호.

 

이 분들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바깥은 없다’고 믿고 있으며, 근대 이전의 시간대에 대해 부정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런 지식인들의 발언 뿐 아니라, 전근대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있는 그대로 펼쳐놓는다면 대략 이런 것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느리고, 지루하고, 가난하고, 불편하고, 고달프고, 무섭고 엄하고, 사람 목숨 파리 목숨 같고……. 그러나 이것은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시선에서, 그것도 전근대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집약한 것입니다. 이런 판단에 깃들어 있는 것은 “과거의 모든 삶을 20세기적 사고로 붙잡을 수 있다는 인식론적 착각”(이반 일리치)일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을 유심히 들여다봤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중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정확히는 중세가 기울어지고 서서히 몰락해 가는 ‘중세의 가을’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양이건, 동양이건, 우리 사회에서도 조화로운 전근대의 시간대가 분명 있었고 그 시간은 짧은 근대문명과 비할 수 없이 오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은 중세가 몰락의 초입에 들어선 시점에서 가톨릭 세계에서 벌어지는 형이상학적인 논변과 분열, 타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대적 관념으로 보면 좀 우스꽝스런 이단 논쟁이 엄청난 피의 살육으로 이어지고, ‘웃음’의 의미조차 부정하는 종교적 광신이 있습니다.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이른바 역사 소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전근대 사회를 무대로만 활용하고 있을 뿐 작품을 관통하는 논리는 극히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근대적인 세계관입니다. 이를테면 요즘 역사소설로 인기를 끄는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들에서 김훈은 우리의 지난 역사를 온통 원초적인 폭력과 힘의 논리가 지배했던 야만의 세월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두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대응으로 김훈이 제시하는 것은 초인의 ‘칼’(이순신)이거나 적응과 투항(우륵)입니다. <칼의 노래>의 무대를 일본 전국시대로 바꾸고, 이순신의 자리에 사무라이를 대입해도 이 소설은 그대로 성립합니다. 이 작품들은 조선시대 중반기, 혹은 가야 멸망기를 다룬 역사 소설이 아니라, 작가 김훈 자신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으로 역사를 사유화(私有化)한 것입니다.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행적만이 역사적인 전거를 가질 뿐, 이 드라마들을 지배하는 논리는 극히 자본주의적 세계인식과 욕망입니다.

우리가 배운 역사는 강자들의 흥망성쇠의 기록일 뿐입니다. 그것은 대개 왕조의 연대기이고, 전쟁과 억압, 이에 맞서는 항쟁의 연대기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전근대의 삶을 ‘무시무시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이 엄혹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삶은 오직 어두움일 뿐일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어두웠고, 힘없는 이들은 내내 유린당하기만 했으며, 따라서 그나마 높은 수준의 물질문명을 이룩했고, 형식적이나마 평등한 인간관계를 쟁취한 자본주의적 근대 문명이 가장 진보한 것이라는 인식은 이런 맥락에서 정당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백제의 달밤이 지나갔다

고구려의 치맛자락이 지나갔다

 

왕은

백성들의 가슴에 단

 

군대는

백성의 고용한

문지기

 

앞마을 뒷마을은

한 식구

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

쌀과 떡, 무명과 꽃밭

아침 저녁 나누었다

 

가을이면 영고, 무천,

겨울이면 씨름, 윷놀이

아, 지금도 살아있는 그 흥겨운

농악이여

 

늙으면 마을 사람들에 싸여

웃으며 눈감고

양지바른 뒷동산에 누워선, 후손들에겐

이야기를 남겼다 (신동엽, <금강> 제 6장 중에서)

 

지배자들의 흥망성쇠와 무관하게, 민중들이 누렸던 기나긴 평화의 시간대가 있었고, 그 시간대가 근대 이전의 역사를 채웠습니다. 공동체를 유지시키고, 사회적 약자인 그 누구라도 최소한의 물질적 삶을 가능케 했던 공유지가 있었습니다. 출생으로부터 죽음까지 한 개인의 삶을 유지하는 토착적인 지혜와 기술들이 자립적인 삶을 가능케 했습니다. 봉건 영주들간의 전쟁 속에서도 공유지는 언제나 보호되었고, 그들이 누린 자립과 자치의 제도는 지배자들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었습니다. 왕조의 교체와 지배자들간의 전쟁, 지배자의 억압과 이에 대한 민중의 항쟁은 그 기나긴 평화의 시간대에 비하면 ‘예외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이 ‘민중의 평화’가 서서히 깨어져나가고 20세기를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것이 바로 근대의 역사입니다.(이 논의는 이반 일리치, <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한다>, <<녹색평론>> 통권 62호, 2002년 1-2월호를 참고함) 우리에게 출구가 없다는 인식, 인간의 삶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인식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출구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력, 다른 삶의 형상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고전 교육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교육은 바로 ‘민중의 평화’를 재구(再構)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제입니다.

 

5.

저는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탐사하고 새롭게 가르쳐야 할 고전 교육의 영역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얼마 전 돌아가신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한티재 하늘>이라는 대하장편소설이라 생각합니다. 권정생 선생은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작가로 자리매김될 것입니다. 이 분이 일생토록 추구한 것이 바로 ‘민중의 평화’와 지난 100년 사이에 이루어진 그 훼절에 대한 문학적 증언입니다.

이 작품은 구한말인 1895년 을미년으로부터 식민지 시대인 1936년에 이르기까지 경북 안동, 봉화, 청송, 영양 등지에서 살았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인물열전 형식으로 서술한 장편 소설입니다. 이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특징적인 점은 그 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인공을 설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100명이 넘는 등장 인물들이 작가로부터 비슷한 비중의 관심을 받으며 각자에게 부여된 시간대를 살아가는 모습이 장황한 수식이나 미려한 표현을 자제하는 특유의 간결한 문체를 통해 덤덤하게 제시됩니다. 그리고 개별 인물의 개성이 크게 부각되기보다는 마치 유장하게 흘러가는 자연의 흐름 속 작은 세부로서 원경(遠景)으로 비춰집니다. 그는 아래의 진술을 통해 역사는 삶과 죽음의 자연사적 반복이 이루어내는 유구한 흐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가 뒤흔들리고 난리가 나도 세상에는 아기가 끊임없이 태어났다. 조선의 골짝골짝마다 이렇게 태어나는 아기 때문에 모질게 슬픈 일을 겪으면서도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그 아기들은 자라서 어매가 되고 아배가 되고 할매, 할배가 되었다.

 

즉, 그는 역사의 진행은 계급투쟁과 같은 물질적인 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치 다른 식물이나 동물들이 생명으로 태어나 죽어가듯 인간들이 태어나 살다가 죽어가는 흐름의 자연스러운 연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역사관을 통해 바라보는 《한티재 하늘》의 인물들의 삶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인륜 도덕이나 종교 이전의 자연스러운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한티재 하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삶에 지워진 굴레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기꺼이 복종하고, 자기를 희생합니다.

권정생 선생이 《한티재 하늘》을 통해 그린 전통사회는 인간의 도리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살아있었던 시대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타고난 기질과 욕망에 충실하지만 인간의 도리만큼은 결코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깐 등장하는 인물들까지도 예사롭지 않은 인간적 기품을 갖춘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향교골에 사는 자부래미 박서방은 작품 전반부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그는 1895년 을미년 반란을 일으킨 의병(빤란구이)들이 찾아오자 그들에게 밥을 대접하고 양식을 나눠줍니다. 그리고 한겨울에도 가을 홑적삼을 입고 있는 그들에게 무명 핫옷을 꺼내다 입히고 혹시 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강제로 도둑질해 갔다고 하라는 빤란구이들의 말에 “아이시더, 내 목숨 살아볼라고 당신네들 이름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니더.”라고 말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관군에게 붙잡혀 공개처형되어 아무도 치우지 않아 썩어가는 빤란구이들의 시신을 밤에 몰래 치워 무덤을 만들어주고 자신의 집에서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줍니다. 소백산 골짜기인 순흥 가래실에 살던 정원네는 남편 건재가 화적패들에게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토벌대에게 붙잡혀갔다가 장독(杖毒)으로 죽고 집마저 토벌대에 의해 불에 타버린 뒤, 식솔을 이끌고 친정인 안동 삼밭골로 삼백리길을 걸어 가다가 강나루의 나루치(나루지기) 노인을 만나는데, 그는 남루한 행색의 정원네 식구들에게도 ‘마님’, ‘애기씨’라고 부르며 예의를 다합니다.

 

강변 모래밭을 몇 걸음 걸어오는데 갑자기 나루치 노인이 부른다. “마님요! 이것 아직 새 신이시더. 쫌 크제만 신고 가시이소.” 노인이 신고 있던 짚신을 벗어들고 가까이로 다가왔다. 눈꺼풀이 실쭉 움직여지며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정원이 신고 있는 미투리가 다 해어져 한 쪽 발 뒷갱이끈 하나가 떨어져 터덜터덜 끌리고 있었다. … … “먼 길을 걸어오신 것 긑은데 신발이 성해야 앞으로 더 가실 게 아니시이껴?” 정원이 등뒤에서 노인은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시상이 여간 힘들어야제요. 아직도 여기저기 난리는 끈치잖고 토벌대들이 화적패를 찾아 댕긴다드구만요.” …… “마님 긑은 사람들이 며칠에 한 번씩은 강을 건네가시니더.” “자, 이 신을 가져 가시이소.” 노인은 짚신 두 짝을 두 손으로 공손히 내미는 것이었다.

 

나루치 노인은 토벌대에게 남편을 잃고 쫓겨가는 정원네들의 행색을 알아보고 자신이 신고 있는 짚신을 벗어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권정생 선생이 그리는 ‘과거’는 강가의 나루치 노인이나 자부래미 박서방과 같은 민초들도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행동하며, 또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높은 정신적 기품을 가진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인 것입니다.

또한 《한티재 하늘》에서 과거는 ‘가난하고 소박한 농경공동체’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은 일찍부터 농촌의 중요성과 농업의 정신적 가치를 역설하고, 현대세계의 위기는 바로 농업과 마을공동체의 해체에 있다고 지적해 왔는데, 이 《한티재 하늘》 곳곳에서 그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들이 조화롭게 살았던 농경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분이는 저녁마다 이웃 아낙네들을 마당이 비좁도록 불러 모아 삼을 삼았다. 광솔가지로 불을 밝히고 감자를 삶아 내놓고 열무김치를 시원하게 담가 내놓는다. 삼을 삼으며 이야기하고 노래부르고 웃고 떠든다. 열손가리 한 가리 삼실을 잇자면 밤이 이슥도록 무릎이 닳아 해지고 딱지가 앉도록 비벼대야 한다. 하얗게 톺아 놓은 삼실 끝을 입으로 홈빨고 감빨고 입술이 알알하지만 이내 그런 건 잊어버린다. 광주리에는 노란 삼실이 반짝반짝 윤기나게 쌓이고 하늘에 은하수는 뽀이얗게 이슬을 내려준다. 입담좋은 용이네가 옛날 이야기를 새끼 타래 풀 듯이 줄줄 풀어 놓는다. 옥단춘이도 하고 장화 홍련이도 한다. 슬픈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기쁜 대목에서는 함께 웃는다. 목소리가 고운 앵두나무집 새댁이 쌍가락지 노래를 부른다.

… …웃고 떠들다가 배가 고파지면 감자를 삶아 먹고 강냉이도 쪄 먹는다. 더러는 수박밭에서, 모둠보리를 갖다주고 서너덩이 수박을 사다가 샘물에 담가 뒀다가 건져다 쪼개 먹는다. 영분이네 앞마당은 여름밤 아낙들의 세상이다. 삼베적삼 소매자락을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장다리를 훌렁훌렁 드러내 놓아도 흉이 안 되는 별난 곳이다. 삼삼기에는 얌전하게 감출 수도 없다. 훨훨 타오르는 광솔불에 아낙들의 허여멀건 다리가 어둠 속에 봉실봉실 떠 있다. 일을 하는 건지 놀이를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일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일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떠들며 삼아 놓은 삼실이 아침이면 돌방광주리에 수북이 담겨 있다.

 

또한 인간과 공생했던 동식물들에 대한 풍부한 묘사를 통해 우리의 과거가 생태학적으로도 대단히 건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돌아, 이건 뭐꼬?” “쪼바리.” “이건 뭐꼬?” “벌구두디기.” “이건?” “드나생이.” “요건?” “장깨나물.” … … 들나물 이름도 갖가지였다. 나랑나물, 사랑나물, 칼나물, 콧따데기, 돌쪼구, 씀바구, 달랭이, 꼬들빼기…, 산나물은 높은 산에 갈수록 향내가 아리도록 코를 찔렀다. 참취, 곰취, 참뚝깔이, 개뚝깔이, 개미취, 미역취, 가지취, 바디취, 꿩졸라기, 꼬치대, 고수대, 민마늘, 기름나물, 삼나물, 칫동아리, 종발나물, 젓가락나물, 등어리나물, 잔대나물, 산미나리….

 

그리고 이 작품에는 안동 지방 사투리나 생생한 구어체 문장이 자주 등장합니다. 권정생 선생은 근대화 이후 표준어․문어 중심의 언어 생활로 인해 소외되었던 사투리․구어가 갖고 있는 민중적 활력과 실감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 마실 저 마실 어벅다리 짚신을 끌고 체 팔러 댕기는 꼴이야 여북할까? 한낮이 가까워지면 뱃가죽은 짜부라지고 걸어가던 상구란 놈은 업어달라고 찡찡거린다. “상구야, 쪼매만 참어래이. 주막에 가서 국밥 한 그릇 사서 먹재이. 우리 상구 큰 아아다.” 주막에 들러 국밥 한 그릇을 사면 거지반 상구가 다 먹어버리고 뚝배기 구석에 시래기나물만 남은 걸 강생이는 긁어먹고 핥아먹는다. “술걸이체 하나 얼맹고?” 주막집 술어마이가 묻는다. “그간 말총겹체시더. 이십 전 받아야 되니더.” “이십 전이마 쌀이 한 말인데, 오방지게도 비싸네.” “안 그러이더. 말총값 빼고 나마 기우 쳇바꾸 값도 안 나오니더.” 술어마이는 강생이를 힐끗 흘겨보고는 “십오 전 줄꾸마. 팔아라.”한다.

 

<한티재하늘>은 그 자체로도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책이지만, 가장 우뚝한 성취는 바로 ‘민중의 평화’를 만나게 해 주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글의 들머리에서 한 대중가요 노랫말을 분석하면서 거기에 깃든 현대적이고 한국적인 내면의 절규를 이야기했습니다만, 전근대의 삶에서 이런 절규는 매우 낯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티재 하늘>에는 이석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종살이하다 도망친 여인과 함께 떠돌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합니다. 그리고, 산불로 애써 일구던 화전과 집이 불에 타 버리고, 다시 거지꼴이 되어 떠돌다 장터마을의 고지기(동네 머슴)로 근근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너무나 평화롭고 또 넉넉합니다. 작가는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석은 고달팠지만 언제나 웃는다. 시집간 순덕이한테도 그랬지만 아이들하고 우스갯소리도 잘했다. 이석은 언제 어디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는지 끝도 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더러는 이석이가 만들어 들려준 이야기도 많았다.

… … 여름밤 하루 동안 고달픈 일을 마치고 나면 귀리짚으로 엮은 거적을 깔고 모깃불을 피우고 식구들이 이리저리 눕는다. 하늘에는 별이 은구슬을 뿌린 듯이 반짝거린다. 이석은 누워서 순태, 순원이한테 얘기를 들려준다. 함께 거적 구석쪽에 앉아 있는 달옥이도 이석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옛날에 짚신쟁이 할바이하고 수꾸떡장사 할머이가 살았그덩. 할바이는 짚신을 삼아 팔고 할마이는 수꾸떡 맨들어 팔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살았제. 할방네한테는 아들이 일곱이 있었는데 모두 모두 사이좋게 살았제. 그런데 어는게 여름에 억수비가 쏟아져가주 온 시상이 물바다가 돼뿌랬그덩.

…… 요새도 칠석날만 되마 까막까치들이 강물에 다리를 놓아 주고 할바이하고 할마이는 일 년 동안 부지런히 짚신 삼고 수꾸떡 맨들어 기다리다가 그날 하리만 만낸단다.

이야기를 다 하고 나면 모두가 하늘을 본다. 똥바가지가 된 아들들이 북두칠성 별이 되어 있고 짚신쟁이 할바이도 수꾸떡장사 할마이도 별이 되어 은하수 강물 사이에 두고 헤어져 있다. 순태와 순원이는 해마다 여름이면 아배가 들려주는 짚신쟁이 할바이 이야기를 다 알고 있지만 또 듣고 들어도 재미있고 슬프다. ……그렇게 이석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행복했다. 가래실에서 죽은 아배 건재도 그랬듯이 이석은 욕심이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민중의 평화’를 만납니다. 고통스런 노동과 불행한 운명이 가로놓여 있지만, 그 고통과 불행을 다 감당하고 일구어낸 민중의 평화입니다. 고전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이처럼 민중의 평화, 전근대적 삶에 대한 구체적 실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오늘날 근대적 삶의 출구 없는 막막함, 배타적인 경쟁심리, ‘나’로만 수렴되는 고독한 나르시시즘을 반성적으로 비출 거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고전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로부터 근대 이전의 삶에 대한 근대적 관념(혹은 착각)을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더 파국의 기미를 짙게 드리우는 이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어찌할 수 없는 본연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유구한 인간의 역사에서 이 시대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임을 누군가는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다른 세계, 다른 욕망을 향하여 난 출구를 열어주는 것이 바로 고전 교육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믿고 있는 고전 교육의 목표와 제재, 방법론은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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