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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맛집

수업단상-안락과 고통, 그리고 치유

by 인강 2011.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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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다. 꼭 해를 건너 한 번씩,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몸살에 시달린다. 올해는 넘어가나 했더니 그러질 못했다. 이틀전부터 열이 오르더니 온몸이 쑤시고 오한까지 생겼다. 늘 있는 몸살이라 여기고,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전에 두 번,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도 온 몸에 얼음팩을 놓고 덜덜 떨며 체온 떨어뜨린게 처치의 전부여서 병원의 치료라는 걸 그리 신통하게 여기지 않았던 터라 어떻게든 집에서 해결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지난 밤, 걷기 힘들 정도로 앓았고 혼자 하는 얼음찜질 정도로는 열이 내려가지 않았다. 몸살이면 앓고 말겠지만 혹시 신종플루라면..하는 생각에 미치자 걱정이 되었다.

 

 

성적처리에 수행평가에 채점에 이것저것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다. 만일 타미플루 처방을 받는다면 일주일 병가다. 학기말, 성적처리가 가장 바쁜 때에 일주일 병가라면, 여러 사람에게 불편을 끼칠 일이었다. 나 또한 한 해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그러나 안해의 원성과 걱정이 대단했다. 만일 신종플루라면 이제 막 9개월 된 딸아이를 비롯한 가족들의 건강도 문제지만, 나로 인해 동료 교사들과 아이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안해의 말이 맞다. 내가 고집부릴 일이 아니었다. 병원을 찾았다. 신종플루 의심이고 하루 지나도 체온이 떨어지지 않으면 내일 타미플루를 처방하겠다고 했다. 병가를 내고 밥을 우겨 넣고 약을 먹고는 잤다. 자고 자고 또 잤다. 처방한 약에 수면제가 꽤 많이 들었나 보다. 그런데 일어났더니 개운하다. 체온이 내려왔다. 다행이다. 오한도, 몸살도 사라지고 칼칼하던 목도 가라 앉았다.

 

 

오랜만에 잠도 오래, 푹 자고 장모님과 안해의 보살핌에 몸을 놓였더니 정신이 말똥해졌다. 책을 잡았다. 이계삼 선생님의 책이다. 그런데 한 편을 읽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나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읽을 글이 아니었다.

 

 

 

 

 

 

한국 교육을 관통하는 가장 뚜렷한 정서적인 기류는 '일 없이, 편하게' 가려는, 안락에 대한 충동이다. 성장기의 모든 시간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를 응시하고, 대화하고, 어루만져 주고, 그럼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견딜만한 것으로 바꾸어주는 '교육의 기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살기 위해', 상처를 내면 깊숙한 자리에 묻는다. 그리고 그 상처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다닌다. 상처는 폭력으로 외화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끝없이 방해한다.

  

                             이계삼,<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녹색평론, 42-43쪽 '상처의 의미' 중에서..

 

 

지난 두 해동안, 내가 고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해 온 수업을 돌아본다. 내가 원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우리 사회에 상처를 만드는 '구조'를 들여다 보는 일이었다. 경제, 노동, 자본, 언론, 의료, 국가, 법 등.. 개인의 고통과 상처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는 것, 아주 많은 개인들에게 비슷하게 반복되는 고통과 상처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 '구조'의 책임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가 '나', '너'를 넘어 '우리'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좀 더 나은 '구조'를 선택하는 임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내내 묻고 싶었다.

 

45명, 6반, 250여 명의 아이들에게 2000편이 좀 안되는 글에 묻혀 지낸 그 대화들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알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나의 수업이란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며 아이들 또한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이들과, 아이들이 아이들과 아무리 맹렬히 부딪힌다 해도 그것은 결국 한 발 물러난 이야기들일 뿐. 그 맹렬함이 아이들의 삶 그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그것이, 적어도 나를, 평온하게 했다. 중학교에서 거칠고 아픈 아이들과 보냈던 5년의 시간들, 그 뿌듯하며 가슴 뻐근한 시절은 교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한 품성과 도량을 내내 시험 했고, 그 사이 나는 한 인간으로서, 한 교사로서 적지 않은 배움을 몸으로 얻었지만, 내가 우둔한 탓에 더욱, 그 이상으로 많이 아팠다. 그 상처는 꽤나 깊어서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등줄기가 여전히 서릿하다. 일 없이, 편안하게 정도로 나태한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여기에서의 내 삶과 수업이 아이들의 고통과 상처에서 한 발 빗겨 나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성장기의 모든 시간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를 응시하고, 대화하고, 어루만져 주고, 그럼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견딜만한 것으로 바꾸어주는 '교육의 기술''이 우리들의 교실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그의 이야기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누구보다 먼저 내가, 그런 '응시'와 '대화'와 '치유'와 '극복'을 해 낼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내 인격의 벽을 바닥바닥 긁어내리만치 내 한계를 시험하는 그 갈등의 순간에도 그 상황을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심성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물론 여전히, 나는 오늘, 여기, 먹고 사는 일의 한 가운데에서 한 발 물러나 세상과 사람의 삶과 구조에 대해 질문과 대화를 나누는 수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계삼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이들의 상처-그 삶의 한가운데를 드러내고 살펴보며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는 시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나의 수업이란 또 하나의 너절한 지식의 전람회일 뿐이다. 구조적인 고통을 치유하는 일이란 결국,

 

상처를 치유하려는, 상처를 치유해 본 적이 있는, 그래서 상처를 치유할 줄 아는 '개인'에게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교육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며, 따라서 한국사회는 나아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혼자서 저지르고, 혼자 감당하며, 그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키운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책

 

 

...그의 성찰과 그의 질책과 그의 절망이 모두 소중하다.

그러나 그 절망은 고스란히 다음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을 교실 어디에서,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떤 수업에서,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어떻게, 가능할까...

 

..담임교사..그리고 문학...

 

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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