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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브랜딩/툴툴툴- 소통

호러역사학 = 윤리의 국가 vs 자본의 국가

by 인강 2011.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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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편했지만 밉지는 않다.(^^;;) 오히려 학자로서, 읽는 이들의 진을 쏙 빼내도록,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는 데 자료를 찾고 통계를 내고 분석하고 근거를 만드는 강명관 선생님의 그 엄청난 열의와 집중과 근성의 작업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또 다행이게도..^^;;) 나는 학자가 아니고, 그래서, 그의 주장과 논리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이만한 근거가 모두 필요하지는 않다. 강명관 선생님의 열정과 근성은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거기에 더하자면, 대체 이 내용들을 아이들과 어떻게 나누어야 할 지 읽는 내내 감을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윤리의 시대, 국가-남성이 여성의 몸과 맘을 어떻게 착취하고 수탈했는지, 어떻게 검열하고 통제했는지가 처절하게 드러난 이 글들을 어떻게 아이들과 나눌 수 있을까. 걱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역사적 사료 이전에, 대체 아이들에게 어떠한 질문을 던져야 할까?

 2. 아이들의 오늘과, 이 책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열녀라는 이데올로기 발명품-이 엄청난 효율의 소프트웨어.

열녀라는 것이, 순전히 조선 중기 국가-남성 지배계층들의 열정적인 발명품이라는 이야기가 우선 놀라웠다. 고려도 물론 남성중심의 사회였으나 재산분배와 혼인관계, 재혼의 문제에 있어서 고려의 여성이 조선의 여성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새로웠던 것은 의부의 존재였다. 고려시대에 사람들은 남편의 죽음 이후 재혼하지 않은 여인들을 정녀로 부른만큼, 안해의 죽음 이후 재혼하지 않은 남성들을 의부로 부르며 함께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의 오랜 기간에 거쳐, 특히나 임병 양란의 혼란과 죽음과 고통과 회의의 시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윤리-국가-남성>은 오히려 더욱 강고하게 <의식화-죄의식-죽음(숭배)>으로 <여성-몸-맘>을 <소유-통제-착취-수탈>했다. 이러한 역사적  참극은 기록되어야 하며 기억되어야 한다. 그 당위를 인정한다. 그래도 고민은 남는다. 그 과정이 얼마나 첨예했으며 치졸했고 폭력적이며 잔인했는지 아이들과 함께 확인해 보는 것은 과연 어떤 질문으로 시작해야 할까?

 

열녀를 아느냐? 조선의 여성들의 삶을 아느냐? .. 이 질문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생생하게 다가갈까..돌아올 반응이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되지 않는 건 나의 편견일까?..충분히 그럴 수 있다. 수업은 교실의 교사와 학생의 관계로 시작하며, 교사의 숨으로 수업의 생기가 북돋워지는 정도는 얼마든지 다르다. 그러나, 그래도 걱정이다. 이미 아이들에게 그들은 '화석'이 되어 버리진 않았는가. 아니, 화석이 되어버린 그들을 오늘의 교실에 생생히 되살리기에는, 이런 질문은 너무 '화석'같지 않은가?

 

 

또 다른 고민은, 이 잔혹함의 어디까지를 함께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나는, 이 호러 현장의 어디까지 함께 가야 하는가?  늘 그렇듯이, 권력의 서열화는 그 줄서기의 맨 끝에 위치한 이들을 가장 혹독하게 다룬다. 정말 비열한 것은, 그 혹독한 고통을 신성화했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과 맘을 그들이 어떻게 소유,통제, 착취, 수탈했는지 밝히는 구체적 사료들은 정말 충분히, 끔찍했다. 전쟁 중에 해적들이 여성을 강간하고 도륙하는 장면도 끔찍했지만, 그것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교묘하게 활용하는 조선이라는 국가-남성은 거기에 갑절의 비열함을 더했다. 그런 의미에서, 열녀문은 조선이라는 국가-남성 새디스트 집단의 마지막 변태적 기념물일 수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참담함이란... 나는 이 참담함이 오늘의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책 분량의 9할 이상을 이 변태 호러 현장을 증명하는데 할애하는 이 책을, 과연 나는, 아이들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결정적으로, 이 책에는 읽는 이들의 '선택'이 들어갈 틈이 거의, 아니 전혀 없다. 강명관 선생님의 자료 속에서, 가치 판단은 이미 명확하다. 자료에 대한 확인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다. 고통이 극심한 역사일수록, 우리는 더 기억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 고통의 역사를 어떻게 오늘의 우리와 만나게 할 것인가?

 

 

 

 

 

이건 학자의 몫이 아니다. 교사의 몫이다.

 

여기서 내가 시작하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이라는 국가-남성에게 '윤리'는 그들의 '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자 그들의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강력한 원칙이었다. 그들에게 '윤리화'는 곧 '중국화'였으며, '중국화'란 당시의 세계관으로서는 곧 '세계화'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지배계급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자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강력한 원칙이며 동시에 '세계화'의 핵심으로 강조되는 이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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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경쟁력.

혹은 자본 경쟁력이라 할까. 어린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가장 약한 남성부터 가장 강한 여성까지,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말하고 요구 당하며 요구하는 말-경쟁력. 그 중에서도 경제적 경쟁력이다. "너의 경쟁력은 얼마만큼의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느냐?" 경제적 경쟁력은 국가의 모든 정책이 즐겨찾는 명분-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사람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이며, 국가 조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운영 원칙이다. 거기에, '경제적 경쟁력'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세계화'아니던가. 

 

2.

 조선에서 국가-남성은 '윤리'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당대의 가장 약한 이들이면서 그들이 가장 탐내는 이들, 곧 여성의 몸과 마음을 소유-통제-착취-수탈했다. 수백년에 걸친 이 열정적인 작업은 놀라운 효율로 거대한 효과를 발휘했는데, 그 완성은 소유-통제-착취-수탈의 대상이었던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국가-남성의 눈으로 신성화하며 내면화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국가-남성의 '윤리'에 어긋날 때면 수치를 느끼며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지배계급에게 몸과 마음을 소유-통제-착취-수탈을 당하는 대상 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탐내는 인간상은 누구인가? 그들은 얼마나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내면화 했는가?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근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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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그 중에서도 학벌 소비자.

30대 중반 이하의 '학생'이라 불리는 모든 이들. 그들은 자신을 서열화하는데 너무나 익숙해 있으며 서열화에 따라 극심한 차별을 받는 데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여긴다. 경쟁에 누구보다도 익숙하며 그것이 경제력과 직결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 거친 경쟁을 거친다 해도 결국 노동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안에서, 그들은 '노동자의 시선'이 아닌, '경영자라 불리는 국가-자본-기업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매 해, 적지 않은 학생들이 성적을 비관하여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마지막 일기에 적는다. '미안해요...' 그들은 국가-자본-기업이 요구하는 '경쟁'에 뒤처질 때면 수치를 느끼며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3.

 조선의 여성들이 국가-남성의 시선으로 '윤리'를 내면화하고 죄의식을 쌓은 데에는 국가-남성이 열정적으로 편찬한 교화용 서적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특히나 국가-남성이 누리는 권력의 정당성이 가장 혹독하게 의심받는 순간, 권력을 향한 그들의 작업도 그만큼 더 열정적이며 섬세해졌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쟁이 조선을 휩쓸던 반세기는 그 절정이었다. 여성들은 이들의 교화용 서적들-소학언해, 동국삼강행실도 류의 국가 편찬물들, 내훈이라 불리는 2차 편찬물들, 규방가사에 삽입된 수많은 열녀 이야기들 등등..- 을 철저히 탐독했으며 내면화했다. 자신의 현재를 살피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자신의 새로운 선택과 행동을 하는데 늘 이들 교화용 서적을 놓고 고민하며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지배계급이 자신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자신의 제도적 모순들을 감추기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보급하고 교육하고 있는 교화용 서적은 무엇인가? 

 

  

 

 

 

성적표.

 자신의 현재를 살피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자신의 새로운 선택과 행동을 하는데 오늘의 '성적표'만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출판물이 있을까. 전 국민이 자신의 능력을 동일한 기준과 문제에 의해 측정받고 전국 단위의 서열로 정리되는 경험이 인류 역사의 어느 순간에 있었던가. 이것은 완전히 '근대적인 경험'이다. 각종의 그 이데올로기가 어떠하든, 교화용 서적을 놓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던 주체적인 반성과 성찰의 시기는 이제, 외부의 기준으로 정연하게 정리된 통계로 자신을 판단하는, 상대적인 비교와 반성과 전략과 필승을 다짐하는 시기로 변한 것이다.

 성적표는 '경제적 경쟁력'을 홍보하고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가 흔들릴 수록, 국가 시스템의 효용성에 대한 의심이 짙어질수록, 권력을 가진 이들은 더욱 가혹하게 '경쟁'과 '경제력'을 밀어 부치고, 더 많은 성적표를 만들어 낼 기회를 짜낸다. 성적표가 만들어지는 구조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성적표 안에서 자신의 상대적 위치에 대한 열등감과 우월감 무엇보다 불안을 넘어선 '공포'로 바뀔 때, 그들은 성공했다. 더 완전한 것은 경쟁으로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심지어는 죽음으로) 몰아 넣는 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신성화하고 절대화 했을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열녀 이데올로기의 전승은 '죽은 자'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패턴으로 판단하자면, 조선의 열녀에 해당되는 이들은 오늘, 성적으로 비관자살하며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는 아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들은 사회적인 우상이 되지 않는다. 그저 잊혀질 뿐이다. 그들은 국가-기업-자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죽은 자는 필요없다. 죽은 자는 끝끝내 착취당하는 자신의 노동을 감수하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을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돌리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끝없이 소비를 하지도 않는다.  죽은 자는 소비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열인은, 강남 8학군의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비천한 능력에도 부모의 경제력으로 제조되어 몇 개 돈 되는 학교에 들어선 삼성맨들이다. 노력하면 된다..가 아니라, 돈 있으면 된다..를 몸소 보여주는 이들, 그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가-기업-자본이 원하는 현대의 열녀가 아닐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노니모해에서 나눴다. 나의 잘못을 깨달았다. 우리의 논의는 고전문학수업이지 인문학 수업이 아니었다. 정확히 날을 어디에 세우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잠시 내가 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둘째, 이 글을 국가 권력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할 것인가, 성권력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할 것인가에 따라 교재를 활용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책의 내용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 문제는, 나와 만나는 아이들은 남자 고등학교의 거칠고 방장한 열 여덜살의 청년들이며, 성적으로 남성성에 심각하게 편향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권력에 관한 질문을 '열녀의 탄생'으로 들이미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솔직히 겁 난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방향의 정 반대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성권력에 대한 질문은 오늘,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국가 권력의 문제로 읽는다면 나와 만나는 아이들에게 잘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여전히 고민은 된다. 음... 암튼, 여러모로 많은 공부를 하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그러다 보니, 문득 겁이 좀 난다.

 고전문학 수업..잘 할 수 있을까..

 고전문학작품과 오늘 우리의 '관계'를 얼마나 '생생하게' 살려 내느냐..

 여기에, 고전문학 수업의 성패가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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