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릉역에 선릉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선릉역에 선릉이 있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선릉역 곁에는 선릉이 있고, 여의도 역 곁에는 여의도가 있다. 일반 곁에는 늘 장애가 있듯이.
익숙함이 가리는 것들이 있다. 선릉역이 선릉을 가리듯이. 익숙함은 때로 많은 것을 가린다. 낯설게 보는 훈련은 그래서 중요하다. 낯설게 보는 것이란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니다. 원래 있던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 선릉역에 선릉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릉역 곁에 선릉이 있다. 그것을 모를 수 있다.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이고, 지나가는 존재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배운다. 그게 인간이라는 종을 이제까지 유지하게 만든 힘일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한계이다. 한계를 넘어서는 이들에게 감탄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아니, 대개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비난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선릉역 곁에 선릉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 내가 먼저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먼저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애초에 선릉역 곁에 선릉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선릉이 있어 선릉역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특별한 것은 선릉이었다. 이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에 의미를 부여한 존재는 바로 선릉이니까. 먼저 의미를 이룬 것들에게는 최소한의 존중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의미는 인간에게 소중하니까. 의미는 인간이 이 시공을 견디게 하는 근원이니까 말이다.
내가 바라지 않는 최악은, 분명히 알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예전과 똑같이 모르거나,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보다 나쁘다. 그것은 의미 있는 존재들에 대한 경멸일 수 있기 때문이다.
- 한두운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까지 관찰한 바, 한두운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 걷기. 침뱉기. 사람 따라다니기. 10키로 배낭을 메고 걷기. 사람과 거리두기. 사람을 두려워하기. 돌로된 동물 보기. 강아지 무서워하기. 친근함 표현하기. 배가 고프면 밥 이라고 말하기. 미친 듯이 밥먹기. 온몸에 소스를 다 쏟아붓는 한이 있어도 주린 배를 가득 가득 채우기. 나무 이름 외우기. 복싱. 원 투 리듬. 아름다운 위빙. 주먹을 지켜보며 거리를 유지하기. 나의 복싱 이야기를 이해하기. 나이 별명을 정확하게 기억하기.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폭력을 감추기. 폭력을 멈추기. 자신에게 벌주기. 자신을 이기기. 상대방의 이름 기억하기. 곁에 다가가 주먹 속으로 자신의 손가락 밀어넣기.
할 수 없는 것. 글자로 된 금지 표시를 인식하고 그에 맞게 안하기. 침 안뱉기. 자신이 겪은 상황을 말로 표현하기. 동사와 형용사, 혹은 서술어 사용하기. 밥을 천천히 조용하게 먹기.
- 나는 왜 한두운이 이해가 안되고, 기분이 나쁘고, 불편할까?
서술자 '나'는 이해가 안되면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불편해 지는 사람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이해가 안되도 기분이 나빠지거나, 마음이 불편해 지지 않는 사람도 세상에는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술자 '나'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이 그런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건 그냥 당신의 성향이다. 그건 그냥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기분이 나빠지고, 당신의 마음이 불편해 지는 것은 타인의 잘못이 아니다. 물론 당신의 잘못도 아니다. 이것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좀더 기분이 덜 나쁘고, 마음이 덜 불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술자 '나'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게조차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불편한 거 같다. 그런 나에게 한두운이라는 존재가 왔다. 당연히 이해가 안되고, 그러니까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 역시 한두운을 현실에서 만났다면, 이해가 안되고, 기분이 나쁘고, 불편했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두려워 하기까지 했을 것 같다. 내가 한두운을 현실에서 만났다면, 그것도 어느 식당에서 가족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내가 먼저 경찰이나 119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입 안에 온갖 음식을 밀어 넣고, 그러다가 토하고, 온 몸에 소스가 흐르도록 다시 음식을 밀어 넣고, 또 토하고, 누군가 음식을 뺏으면 짐승처럼 누워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눈 앞에 본다면, 나는 정말 이해가 안되고, 기분이 나쁘고, 불편하며, 심지어 두렵고, 그리고 마음 저 아래에서부터 차올라, 정말 화가 났을 거 같다.
어떻게 저런 난동을 부리는 사람을 이렇게 그냥 둔단 말인가? 우리 가족의 평화를 박살낸 사람, 내 마음의 평화를 박살낸 사람에게 화가 났을 거 같다. 그 화는 분명 두려움에 근원이 있을 것이다. '저러다가 저 미친놈이 돈까스 칼을 집어들고, 갑자기 나에게, 내 아내에게, 내 아들과 내 딸에게 달려든다면? 나는 어떡하지?' 인천대교를 넘을 때마다 무심히 이 다리가 무너진다면 나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는 나다. 그런 나이기에 현실에서 식당에 있는 한두운을 만났다면, 분명 이런 생각을 했을 거 같다. 어쩌면 내가 먼저 경찰에 신고했을 거 같다. 내가 먼저 119에 신고를 했을 거 같다. 그리고 이 정도의 난동이라면, 이것은 충분히 경찰이나 구급대에 신고할 상황이다. 식당에서의 한두운의 모습, 이것은 분명 상식을 넘어선 상황이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위협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식당에서의 한두운만 본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한두운을 내내 만났다면 나는 어땠을까? 한두운의 헤드기어와 나무이름 외우기와, 선릉의 길들을 걷기와 누구도 관심 조차 주지 않는 것들에 내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몰입하는 표정과, 난데없이 명확하게 터진 원투와, 나비처럼 아름다웠던 위빙을 본다면, 한두운에게 내 젊은 날의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고, 복싱으로 한두운과 교감을 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하루를 보냈다면, 놀이터에서 멍청한 원숭이들같이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10대들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같이 모래밭을 뒹굴고, 음료수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에 원투와 스트레이트 연타를 날리는 한두운을 안고 쓰러져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안아주었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기운이 다 빠져나갔는데도,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내내 꽉 쥐게 되었던 주먹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쑤욱 밀어 넣었던 한두운을, 그리고 나의 별명을 기억해 준 한두운의 얼굴을 바로 곁에서 보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여전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겠지만, 그 때에도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불편했을까?
상상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작품을 통해 찾아낸 질문들에 내 삶을 통한 답들을 시도해 보는 것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상상은 결국, 작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재가 지금 바라는 것이 작품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은 것이라면, 나는 결국 작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 시도들이 늘 올바른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대개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게 했다.
작품 속에서 서술자인 '나'가 한두운과 그런 극적인 하루를 다 보내고 나서도, 여전히 한두운을 보면 기분이 나쁘고 불편한 마음이 든다면,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거 같다. 그것은 내가 한두운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유연함과 융통성이 부족하며 어떤 일을 해도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사이의 변수를 캐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대로 '내가 세상을 보는 태도'에 대한 '나'의 인식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이란 유연하며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쉽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것 같다.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살펴서 그것을 그대로 해 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유연함이 부족하게 살아가는 것, 융통성이 부족한 채로 살아가는 것, 자신의 스타일대로, 자신의 고집대로, 자신이 홀로 살아가는 삶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일을 해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지만, 그나마 자신이 적응할 수 있는 일, 그나마 자신이 적응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유연함 없이, 융통성 없이, 사람들 사이의 그 사교적인 유연함과 융통성 없이, 그저 홀로 그 일을 하는 삶, 대개 권장되지는 않지만, 분명 가능한 그런 삶을 '나'는 원하지 않는 것 같다.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은 되도록 멀리하고,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구별하며, 자신의 마음이 바라는 그대로 해 내려는 삶을 나는 바라지 않는 것 같다.
-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 수군거림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다. 문명이라는 시스템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대응이라는 시스템 위에 건설되었다. 국방, 의료, 교육 등이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표정과 눈빛과 수군거림을 비난할 수 없다.
현재까지 이 눈빛과 표정과 수군거림을 거의 0에 가깝도록 제거하는 내가 아는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 뉴욕의 방식이다. 미국의 뉴욕은 온 세계의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국가와 정체성이 압도적인 다양함으로 뒤섞여 있다. 너무 다른 것들이 너무나 다양하게 있어서, 이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인종만 선택받을 수 없고, 어느 문화가 우월할 수 없으며, 어느 국가가 열등하지 않고, 어느 정체성이 배제되어야 하지 않다고. 그들은 너무도 다르기때문에, 평등이라는 가치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이다. 이곳은 너무 똑같아서 너무나 다르다. 거기에 한여름에 헤드기어라니.
- 한두운의 행동을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거부해야 할까? 한두운에게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을 폭력에서 구하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까?
- 한두운에 대한 돌봄을 가족에게만 맡기는 것은 가능한가? 정당한가? 다른 방법은?
- 한두운의 언어능력은 5살 정도. 그렇다면 한두운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5살의 언어습관을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 한두운은 파피용이라는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두운은 사람에 대해서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복싱?
먼저, 한두운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시작은 두가지. 명사와 복싱.
명사. 한두운은 명사로 소통한다. 명사에 익숙하다. 명사를 기억한다. 한두운과 소통을 시작하려면 명사에서 시작해야 한다. 명사로 소통하는 것은 대개 4살 내외의 언어능력이 아닐까? 4살 내외의 언어능력을 공부해서, 이 나이의 사람이 명사에서 어떻게 동사와 형용사로 언어를 익히는지, 어떻게 문장을 완성하고 서사로 언어능력을 확장해 가는지 공부하면 도움이 될 거 같다. 한두운의 언어능력은 4살 내외이지만, 한두운의 행동과 눈빛을 보면 4살 이상의 감성과 이성이 있는 듯하다. 정확하지 않다. 근거도 없지만 시도해 볼 만하다. 한두운이 좀 더 불편없이, 좀더 자유롭게, 좀더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지금의 언어능력에서 더 발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충분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
복싱. 한두운은 복싱을 배웠다. 복싱을 조금 배워봐서 아는데, 아니 모든 운동이 다 그러겠지만, 기본동장 하나를 제대로 해 내는 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한두운은 복싱의 기본기를 정확히 해 낸다. 위빙은 기본기이자 고급기이다. 상대방의 주먹을 보며 정확히 거리를 유지하며 위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1년 이상의 체육관 훈련이 있어야 한다. 상당히 빠른 속도의 시각적인 자극에 몸의 반응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한두운은 아름다운 위빙을 한다. 대단한 능력이다. 무엇보다 복싱에 호감을 갖고 있다. 헤드 기어를 거부하지 않는다. 복싱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나를 파피용이라 불렀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뜻이다. 적어도 파피용이 나의 별명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하다. 한두운은 다른 모든 이야기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복싱 이야기에 이토록 기억이 또렷한 것은 한두운이 복싱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복싱이라면 한두운과 소통하는 데 크게 매력적인 듯하다. 복싱은 한두운이 세상과 소통하게 해 줄 것이다. 더불어 한두운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될 것이고. 한두운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모습이 기대된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을 폭력에서 구하려면, 공공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인간 개인은 한계가 명확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에 대부분의 인간은 폭력을 쓴다. 그것이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가장 익숙하면서,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좀 더 나은 해결책을 얻으려면 공공의 시스템, 그러니까 문명이 필요하다.
한두운을 가족에게 맡기거나, 나와 같은 1일 알바생들에게 맡기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이 될 거 같다. 나의 선배도 한두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한두운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사이에만 서 있는 나 역시, 한두운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럴 수 있다. 그는 그저, 알바생일 뿐이다.
공공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개인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에서 대응해야 그나마 지속가능하지 않을까. 민주주의가 결국 민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가능한 민의 범위를 넖히고, 주인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향이 우리의 가치가 아닐까? 한두운과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도 자신의 삶에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가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최악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폭력이 무엇인지 먼저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자율적이면서도 안전하게, 효과적이면서 효율적이게, 한두운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더불어 타인과의 언어소통과 자신의 욕망 통제에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분야는 정말 모른다. 문외한이다. 부디 깊은 공부를 하는 분들께서 잘 해주시기를 기원할 뿐.
- 한두운은 왜 한두운을 정확하게, 진지하게, 때렸을까?
정말 궁금하다. 한두운은 10대의 폭력배들에게 모욕을 당한 다음 자신에 대해 공격했다. 10대의 폭력배들과 멋지게 싸웠을 때는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다.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나는 때리지 못한 자신을 때린 것, 그러니까 일종의 벌주기. 둘은 때리지 못해서 대신 때린 것. 그러니까 일종의 스파링. 어느 것이든 분명한 것은, 한두운은 자신은 타인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타인으로 대하는 것은 슬프다. 그리고 위험하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겠다. 이건 공부가 깊은 분들께 정말 묻고 싶다.
-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동의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한두운과의 하루가 나에게 준 소중한 인식이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내가 한두운을 충분히 오해하고 왜곡했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라면, 이것은 더없이 소중한 깨달음이라는 생각이다. 이 깨달음이 우리에게 좀 더 많은 유연함과 융통성을 주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이 다음 문장이었다. 마음이 덜컥 걸려서, 다음으로 넘어가기가 내내 불편했던 이 다음 문장은 아래와 같다.
- 아니,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솜씨 좋은 작가처럼 거짓을 진짜처럼, 혹은 진실을 가짜처럼, 영혼은 편하게 침대에 눕혀놓고 하루 종일 내 손을 잡고 유령처럼 산책하다 집에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모르는 일이니까.
무례하다. 최소한, 무지하다. 한두운과 그 강렬한 하루를 보내놓고, 이렇게 다시 모른다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루를 보내며 한두운에 대해 알게 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결말도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 왜 나는 한두운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으려 했을까? 심지어 유령이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이것은 한두운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정말 냉혹한 무시가 아닌가? 나는 여전히 자신의 기준에서 악착같이 상대방의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하지 말아야 할 선도 분명 있다. 그 선을 넘어서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상대방에게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두운에게, 그 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김원영 작가님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이후로
삶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
희망이 아니라 욕망을 원하고,
장애자가 아니라 남자로 봐 주길 바란다는 메시지는
선명하고, 매력적이며, 충격적이었다.
장애와 정체성은 공부할수록 어렵고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어렵지만 꼭 필요한 공부라는 것이다.
차별주의자는 되고 싶지 않지만, 알고 있다. 나 역시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걸.
선량한 줄 알지만, 웃고 우는 얼굴로, 결국은 차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 공부가 필요하다.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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