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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고민 읽고 시 처방하기 수업-단원고등학교-물꼬방2019자료집

by 인강 2019.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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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상담소 '시시'(時詩)- 당신의 고민을 시로 처방해 드립니다
바람이 쌀쌀해지던 때였는데 채린은 회색 후드를 즐겨 입었다. 개장 선언 이후 하루에 서너 개의 고민 쪽지가 후드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마 누군가의 장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그냥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채린과 나는 정식으로 상담소를 열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포스트잇을 한 장씩 나누어주고, 왼손으로 고민을 쓰게 했다. 다 쓴 다음에는 책상 위에 뒤집어 두었다가 상자에 담도록 했다. 채린은 앞에 나와서 친구들의 고민을 읽었다. 재미있는 고민도, 진지한 고민도 있었다. 고민을 낭독하는 사이 주어진 한 시간이 흘렀고, 나는 상자에 고민들을 다시 담게 한 다음 교실을 나섰다.
 
 
· 요즘 자꾸 감정기복이 심해서 슬퍼요.
· 고무신도 짝이 있는데, 저는 왜 없죠?
· 하루가 모자라요. 공부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는데, 잠도 자야하고. 다음 주부터는 학원도 가는데 어쩌죠?
· 임플란트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알바를 시작해야 하는데 하기 싫네요. 어쩌죠?
 
 
고민에 대한 처방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고민과 슬픔이 넘쳐나는 시대이고, 그 시대의 흐름에서 문학이 해내는 몫이 있다. 몇 해 전 읽은 기타다 히로미쓰의 책 『앞으로의 책방』에는 책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한가득이었다. 눈길을 확 끌었던 부분은 바로 ‘Bibliotherapy(비블리오 테라피)’였다. 손님들에게 문진표를 작성하게 해서 그 자리에서 처방책을 제안하는 것이다. 책을 약봉투에 넣어 증상별로 소개한다니! 처방을 받은 이는 ‘나에게 꼭 맞는 책’을 찾은 것 같은 기분으로 돌아갈 것이다. 서울 창천동에 있던 ‘사적인 서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글이 주는 위로, 나만을 위한 큐레이션. 사람들은 그 감동을 느끼고 있다.

최지혜, '시 수업 이야기 - 시 경험쓰기와 시처방, <물꼬방 2019 자료집> 중에서...


자신의 공부를 자신의 수업으로 피워내는 사람

이 바쁘고 번잡한 세상에

마음을 내어 공부를 하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보다 더 쉽지 않은 것은 

그 공부를 자신의 수업으로 피워내는 일.

내게 최지혜샘은 그 어려운 일을 해 내는 분이다.

지혜샘의 시공부가 깊어질수록 지혜샘의 시수업이 기대되는 이유.








시 수업 이야기
- 시 경험쓰기와 시 처방 -
 
최지혜 ∥ 단원고등학교 ktcjh0925@naver.com
 
1. 들어가며
얼마 전 출간된 문보영 시인의 에세이에는 밥을 사달라던 과 후배와의 대화가 담겨있다.
 
“그는 나에게 왜 시가 좋으냐고, 왜 문학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덧붙였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지 증오하는지 분간이 잘 안 서는데 문학 없이 살 수 없는 건 맞는 것 같다고, 상처 난 부위에 거즈를 붙일 때 거즈를 사랑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는 기호랄 것이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피를 멈추려면 거즈를 대야 하는 것이 맞다고, 어쨌든 거즈는 다소간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했다.”
- 문보영,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쌤앤파커스, 2019.
 
누군가 나에게 “왜 시가 좋으냐고, 왜 문학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아이들과 좋은 문학 작품을 읽기 위해? 타자에 공감하면서 세상을 좀 더 잘 살기 위해? 솔직하게 말하면 내게는 더 앞서는 이유가 있다. 나는 문학 속에서 위로 받는다. 아이들에게도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주로 시를 중심에 둔 수업에서 아이들이 ‘문학의 거즈성(?)’을 느낄 수 있도록 시도한다. 매 학기 하고 있는 ‘시 경험쓰기’가 대표적인 수업이다. 아이들이 시를 통해 기뻤던 순간을 떠올린다면 그것대로, 슬펐던 순간을 떠올린대도 그것대로 치유의 효과가 있으니까. 이어서 ‘시 처방’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하려 한다.
 
2. 시 경험 쓰기
‘시 경험 쓰기’는 아이들이 시를 고르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말로 풀어쓰는 수업이다. 수업의 상세한 절차가 궁금하신 분들은 단행본 『한 학기 한 권 읽기』나 교육부 『한 학기 한 권 읽기 자료집』을 참고하기를 권한다. 물꼬방 홈페이지의 지난 연수 자료집에서도 시 경험쓰기의 다양한 수업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사실 이번 학기는 2년 간 휴직 후 새 학교로 복귀하면서 난항을 겪었다. 그럼에도 큰 어려움 없이 이어갈 수 있었던 수업이 ‘시 경험쓰기’였다. 학기 초 시집을 교사 한 사람당 50권 마련해주십사 도서관에 요청했고그것으로 5월 말에 수행평가를 하기로 했다. 시 경험쓰기는 4차시 동안 이루어지는 수업이므로 학기 중반부터 시작해도 가능하고, 그때까지 도서 준비 기간을 가질 수 있으니 복직 교사나 초임 교사들도 실행하기에 부담이 적다. 학교 도서관의 지원으로 학생 시집과 창비교육의 청소년 시집을 다수 구입할 수 있어 든든했다. 그런데 이는 결과적으로 오히려 학생들의 선택을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 수업에서는 다섯 권 내외로 가지고 있다가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있을 때 슥 건네면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쉬운 시집이 열 권 쯤 있으니 아이들은 그 책만 찾았고, 준비해간 좋은 시집들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반 시집 중에서는 신미나와 박소란, 안희연, 황인찬, 유희경의 시집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다수 있었다.
문단에서는 2010년대에 들어 우리 시단에 서정시가 다시 부활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시에는 서정의 바람이 분다. 무섭다, 외롭다, 슬프다 같은 정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학생들도 공감하기 쉽다. 사랑 시로 읽히는 작품들도 드물지 않다는 점도 아이들이 호응한 원인이었다. 시의 길이도 길지 않다.
수행평가 실시 이전부터 조금씩 시 읽기는 이루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는 첫 단원이 시다. 학기 첫 단원의 발을 뗀 작품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가치, 즉 ‘잘 슬퍼하기’를 전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수업 시간에 시를 한 편만 읽기는 아쉬워서 저장해두었던 시들 가운데 두 편을 더 골랐다. 선택한 시는 박준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와 박소란의 「베개」였다. 학생과 내가 한 편씩 시낭송 녹음파일을 만들었고 수업 도입의 첫 시간을 ‘시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아이들에게 두 편 가운데 마음에 드는 시 하나를 고르고, 인상적인 시구를 찾은 다음 밑줄을 긋도록 했다. 그런 다음 고른 이유를 쓰고 모둠 내에서 나누도록 했다. 각 시를 고른 아이들이 비슷한 비율로 나왔다. 이어서 아이들이 만든 질문 ‘슬픔은 부정적인 감정일까?’,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을까?’, ‘왜 시는 슬픔에 대한 것이 많을까?’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시간이 갔다.
그런데 시 경험쓰기 수업 3차시에 계속 시집을 바꿔가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태현이 내게 다가와 내가 이전에 소개한 시들 중에서 한 편을 골라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하니 학기 첫 시간에 함께 읽었던 박준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를 옮겨 적었고, 다음날 아침 태현은 종이를 빽빽하게 채운 글을 들고 왔다.
 
 
 
 
▶ 고른 시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전문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 학생 글
나는 어릴 때 항상 기계적으로 부모님이 보내주신 학원에 다니고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이 해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맞춰 살아왔다. 그리 살다보니 어릴 때의 나에겐 항상 “OO이는 똑똑하구나” “OO이는 예의가 바르구나” 등의 칭찬이 따라다녔고 반대로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아와 비교당해 저평가되기 일쑤였다. 그때는 내 눈에 그저 어른 같아 보이던 중고등학생들과 같은 내용을 공부한다는 걸로 추켜올려지는 것이,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아 마냥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조금 커서 보니 이런 미사여구들은 다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나 스스로도 느꼈다. 항상 날ㄹ 볼 때면 자기 자식들을 불필요하게 까내리며 나를 칭찬하기 바빴던 어른들은 내가 지쳐 있던 시기, 학원을 끊어 성적이 떨어지고 여러 대회에도 나가지 않게 되자 내게 무관심해졌고, 몇몇은 앞에서는 나를 칭찬하는 척하고서는 뒤에서는 날 까내렸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 목메지 않기로 했다. 확실히 내가 성적이 떨어지고 다른 면에서도 조금 못 나진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남한테 욕을 먹을 일도 아니며 더불어 그게 삶을 충실히 산 게 아닌 증거란 건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학원을 끊고 문제집을 손에서 놓고선 유치원생 때부터 나에겐 없었던 자유를 만끽했다. PC방이라는 곳에도 처음 가보고, 노래방에도 가보고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나다니며 지금까지는 경험한 적 없던 새로운 경험을 하며 나 자신에게는 더 충실해졌다. 새벽 4시까지 숙제를 하다 지쳐 잠들던, 시간에 쫓겨 사는 초등학생이 아니라 자유로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살게 되었다.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사니 시간이 남아돌았고 나는 남는 시간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접하기 쉬운 웹소설이었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해온 이야기의 주인공이 죽자 매우 슬펐고 나는 눈물만 흘렀다. 그전까지는 매일매일이 같은 공정으로 만들어지는 생산품이고 공장이던 세상에서 살았다. 기계처럼 딱딱하던 나에게 허구의 이야기에 공감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고 나는 내 감수성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때부터 시간이 남을 때면 가끔 소설을 읽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에서 대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여느 날처럼 학교에 다녀오니 아버지께서 벌컥 이혼선언을 하시고서는 짐을 싸고 계신 것이었다. 처음에는 상의도 없이 혼자 이혼을 결정하신 아버지를 향해 배신감부터 들었지만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며 내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절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이 날 것처럼 슬펐지만 아무리 눈물을 짜내보려고 해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현관문 소리는 여느 때와 같았을 텐데 그날따라 유독 ‘쾅’하며 닫는 소리가 나를 때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떠나시자 내게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공허했고 그런 상황에서 울지 못한 기계 같은 나에 대한 자괴감뿐이었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에도 부모님은 친구처럼 지내시고 부자관계도 전보다 더 돈독해져서 이제는 슬프지 않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자괴감이 먼저 고개를 치켜든다. 이후에도 외삼촌의 장례식, 허름한 식장에서 치러지는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 등 슬픈 일이 많았지만 그때도 난 그저 눈시울만 붉어졌을 뿐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져온다. 현실의 이야기보다 허구의 이야기에 더 눈물이 나는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슬픈 일이 과하게 많은 이 세상이 잘못된 걸까? 나는 알 수 없다. 나도 현실에 진정으로 울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알 수 있을까.
 
 
 
 
 
 
이번 학기에는 유난히 슬픈 사연이 가득한 글이 많았다. 가만히 원인을 생각해보건대 3차시 수업 도입부에 시 경험 예시 글 두 편을 시간 들여 낭독한 것이 효과적이었던 듯하다. 가족에 얽힌 글 한 편이 아이들의 슬픈 사연을 끌어낸 듯하고, 데이트 장면을 담은 글 한 편이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끌어낸 듯하다.그 결과로 아이들의 깊은 속내와 가정사를 알게 되었고, 소소하고 애틋한 연애담도 실컷 읽게 되었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지닌 한사람, 한사람으로 다가왔다.
 
3. 시 처방
바람이 쌀쌀해지던 때였는데 채린은 회색 후드를 즐겨 입었다. 개장 선언 이후 하루에 서너 개의 고민 쪽지가 후드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마 누군가의 장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그냥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채린과 나는 정식으로 상담소를 열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포스트잇을 한 장씩 나누어주고, 왼손으로 고민을 쓰게 했다. 다 쓴 다음에는 책상 위에 뒤집어 두었다가 상자에 담도록 했다. 채린은 앞에 나와서 친구들의 고민을 읽었다. 재미있는 고민도, 진지한 고민도 있었다. 고민을 낭독하는 사이 주어진 한 시간이 흘렀고, 나는 상자에 고민들을 다시 담게 한 다음 교실을 나섰다.
 
 
· 요즘 자꾸 감정기복이 심해서 슬퍼요.
· 고무신도 짝이 있는데, 저는 왜 없죠?
· 하루가 모자라요. 공부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는데, 잠도 자야하고. 다음 주부터는 학원도 가는데 어쩌죠?
· 임플란트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알바를 시작해야 하는데 하기 싫네요. 어쩌죠?
 
 
고민에 대한 처방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고민과 슬픔이 넘쳐나는 시대이고, 그 시대의 흐름에서 문학이 해내는 몫이 있다. 몇 해 전 읽은 기타다 히로미쓰의 책 『앞으로의 책방』에는 책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한가득이었다. 눈길을 확 끌었던 부분은 바로 ‘Bibliotherapy(비블리오 테라피)’였다. 손님들에게 문진표를 작성하게 해서 그 자리에서 처방책을 제안하는 것이다. 책을 약봉투에 넣어 증상별로 소개한다니! 처방을 받은 이는 ‘나에게 꼭 맞는 책’을 찾은 것 같은 기분으로 돌아갈 것이다. 서울 창천동에 있던 ‘사적인 서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글이 주는 위로, 나만을 위한 큐레이션. 사람들은 그 감동을 느끼고 있다.
김현 시인의 책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의 부제는 ‘김현의 시(詩) 처방전’이다. 시 큐레이션 어플 ‘시요일’에서 연재하던 김현의 ‘처방’을 묶어 낸 책이다. 사람들의 고민 사연을 받아 그에 대한 위로의 시 한 편과 산문을 함께 처방해주는 것은 시인의 아이디어였을까. 라디오를 좋아하며 자랐고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듣는다는 시인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책을 낸 출판사에서 행사를 열 때 DJ라는 소개를 달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시 처방’이란 ‘위로가 필요한 시대’와 ‘시’, 그리고 ‘라디오’의 만남이 아니려나. 라디오에 고민 사연을 보내듯이 익명의 고민을 띄우고, 진심으로 그에 대한 응답을 하는 것. 그 응답을 한 편의 시와 함께 하는 ‘시 처방하기’라.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리라 싶었다. 교원대부설고의 강석희 선생님이 소개한 ‘위로와 치유의 시 수업’연구에는 이 시대의 청년, 청소년층에게 위로와 치유가 될 수 있는 시 목록이 담겨 있어 이를 고민 상담에 활용할 수 있었다.
다음 시간, 고민 상자에 담긴 고민들을 아이들은 하나씩 가져갔다. 아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고민 글에 어울리는 것을 ‘시 꾸러미’에서 고른 다음, 그에 덧붙여 진지한 위로의 말을 썼다. 또박또박 쓴 글씨는 비뚠 고민 사연 옆에 놓인다. 그 둘을 게시판에 한동안 붙여두었다. 더러는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고민과 응원이 공유되던 순간이다.
 
# 1
▶ 고민
내 미래가 너무 어두운데 공부할 의지가 안 생기고 무기력하다. 진로가 걱정…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것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그러니까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근데 거부감이 들어.
 
▶ 시 처방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우물물에 설렁설렁 씻어 아삭 씹는
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옷깃에 쓱쓱 닦아 아사삭 깨물어 먹는
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연두
풋자두와 풋살구의 시큼시큼 풋풋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풋내가 나는 연두
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버드나무의 연두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누가 뭐래도 푸릇푸릇 초록으로 가는 연두
― 박성우, 「아직은 연두」 중에서
(박성우, 『난 빨강』, 창비, 2010.)
 
▶ 친구의 말
“샘이 왼손으로 쓰라고 했는데 왜 안 썼어. ㅋㅋ 누군지 알겠다. 너 피아노 잘 치잖아. 너가 잘 하는 쪽으로 생각해봐. 나도 요즘 공부 매우 매우 싫다. 뭐 그런 거지. 그래도 후회하기 전에는 해보려고 자꾸 생각을 해. 우리 같이 노력하자. 우리 힘내.”
# 2
▶ 고민
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찾나요?
 
▶ 시 처방
 
얼굴 없는
마네킹은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렸다. 내 얼굴에
잘 어울리는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기본 티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죠, 점원이
 
말했다. 흰 티셔츠를 찾아다니다 집에 있는
흰 티셔츠가 기억났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옷장 서랍을 열어보았다.
흰 것들을 모두 꺼내보았다.
흰 티셔츠는 저마다 다른 얼룩을 갖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얼룩에다 치약을 묻혀
비볐다. 지워지고 있는 얼룩을 이목구비가 허옇게 바래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오래 지켜보았다.
 
지워지는 얼룩은
지워졌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가장 자주 입어 가장 쉽게 얼룩이 졌다.
 
― 임솔아, 「기본」 중에서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 친구의 말
“친구야. 나도 하고 싶은 거 없어. 그런 게 갑자기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슬슬 미용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근데 그것도 사실 잘 하는 건지 모르겠고. 가슴이 답답하구나. 우리 같이 천천히 찾아보자. 같이 바람이라도 쐬러 갈까?”
 
 
4.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시 수업들
· 하이쿠 시 쓰기
일본 시 하이쿠처럼 한 줄로 시 쓰기를 할 수 있다. 관찰과 통찰을 담아 한 줄 시를 써서 책갈피로 만들거나 나뭇잎에 남길 수 있다.
 
· 모방시 쓰기
모방시 쓰기의 가치에 대해 의심했던 적이 있다. 주어진 틀과 의미에 장난처럼 말만 바꾸어 넣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반감이 들었다. 그러다 최근 모방시 쓰기에 좋은 작품들을 발견했다. 황인숙,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유형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 파이를 먹었다」 두 편이다. 각각 관찰한 것을 잘 표현할 수 있어서, 유년 시절을 바탕으로 창작하기에 좋다.
<붙임1> 시집 구입 목록 - 시 경험쓰기 수업에서 사용한 시집들
 
문고본
· 윤동주,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디자인이음, 2017.
· 김소월, 『진달래 꽃』, 디자인이음, 2017.
· 한용운, 『님의 침묵』, 디자인이음, 2018.
· 정지용, 『향수』, 디자인이음, 2017.
· 백석, 『사슴』, 디자인이음, 2017.
 
청소년 시집· 학생시집
· 김선우, 『댄스, 푸른 푸른』, 창비교육, 2018.
· 박찬세, 『눈만 봐도 다 알아』, 창비교육, 2018.
· 김애란, 『난 학교 밖 아이』, 창비교육, 2017.
· 정덕재, 『나는 고딩 아빠다』, 창비교육, 2018.
· 이정록, 『까짓것』, 창비교육, 2017.
· 배창환, 『지금은 0교시』, 한티재, 2014.
· 배창환, 조재도 『36.4도씨』, 작은숲, 2012.
· 류연우 외,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 휴머니스트, 2012.
· 최은숙, 『내일부터 빡공』, 작은숲, 2018.
· 봉황중 첫 시동인,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시』, 작은숲, 2016.
· 구자행, 『기절했다 깬 것 같다』, 휴머니스트, 2012.
 
단행본
· 강성은, 『Lo-fi』, 문학과지성사, 2018.
· 강성은,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현대문학, 2018.
· 곽재구, 『와온 바다』, 창비, 2012.
· 곽재구, 『사평역에서』, 창비, 1983.
·곽재구,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문학동네, 2019.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91.
·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 김기택, 『껌』, 2009.
· 김복희,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인간』, 민음사, 2018.
·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 김상혁,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 2016.
·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 김수영, 『꽃잎』, 민음사, 2016.
· 김용택, 『울고 들어온 너에게』, 창비, 2016.
· 김주대, 『그리움의 넓이』, 창비, 2012.
· 길상호, 『우리의 죄는 야옹』, 문학동네, 2016.
· 나태주,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2015.
·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 2001.
·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18.
· 도종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창비, 2011.
·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7.
· 배수연, 『조이와의 키스』, 민음사, 2018.
· 박소란,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1.
·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
·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 책, 2018.
· 신미나,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 2014.
· 신현림, 『반지하 앨리스』, 민음사, 2017.
· 안도현, 『간절하게 참 철 없이』, 창비, 2008.
·안도현,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 2004.
· 안미옥, 『온』, 창비, 2017.
· 안현미, 『사랑은 어느 날 수리 된다』, 창비, 2014.
·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
· 오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2013.
· 오은,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 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2011.
·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사, 2018.
· 이규리, 『최선은 그런 것 이에요』, 문학동네, 2014.
·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이시영,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창비, 2012.
·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
· 이은규,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2012.
· 이장근, 『꿘투』, 삶창, 2011.
·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 정끝별, 『와락』, 창비, 2008.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창비, 2014.
·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 하재연,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문학과지성사, 2012.
· 하종오, 『입국자들』, 산지니, 2009.
· 하종오, 『국경 없는 농장』, 비, 2015.
·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비평사, 1996.
· 함민복,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와 산문 혹은 만화
· 김현,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미디어창비, 2018.
· 신미나, 『시누이』, 창비, 2017.
 
 
<붙임2> 시 처방 수업에서 쓰는 시 목록
 
· 길상호, 「봄비에 젖은」, 『우리의 죄는 야옹』, 문학동네, 2016.
· 김경미, 「이러고 있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문학동네, 2008.
· 김상미, 「오렌지」,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2016.
· 김이듬, 「데드볼」, 『히스테리아』, 문학과지성사, 2014.
· 도종환, 「병든 짐승」, 『사월 바다』, 창비, 2016.
· 도종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창비, 2011.
· 류경무, 「어제」, 『양이나 말처럼』, 문학동네, 2015.
· 박성우, 「아직은 연두」, 창비, 『난 빨강』, 2010.
· 신현림, 「코끼리가 되기 전에」, 『반지하 앨리스』, 민음사, 2017.
· 안미옥, 「빛의 역할」, 『온』, 창비, 2017.
· 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으며 생각한다」,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2011.
· 이규리, 「특별한 일」,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 이규리, 「청송 사과」,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 이승희, 「연신내 약국 앞 포장마차에는」,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 이승희, 「갈현동 470-1 골목」,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 이제니, 「울고 있는 사람」,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현대문학, 2019.
· 이장근, 「꿘투」, 『꿘투』, 삶창, 2011.
· 이현승, 「놀이공원」, 『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2012.
· 임솔아, 「기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 정호승, 「흉터」,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창비, 2017.
· 하재연, 「지구의 뒷면」,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문학과지성사, 2012.
· 시바타 도요, 「저금」, 『약해지지 마』, 지식여행, 2010.
· 메리 올리버, 「기러기」, 『완벽한 날들』, 마음산책, 2013.
 
 
 
<붙임3> 시 경험 쓰기 예시
 
• 예시작품 1
▶ 고른 시
 
부녀
김주대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
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 귀로 운다
 
 
▶ 학생 글
부녀라는 시는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새벽에 들어와 아버지가 이를 슬퍼한다는 내용이지만 나는 반대의 상황이다. 어머니가 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돌아오신다. 나는 조금 예민해서 잠을 자다가 문소리가 나면, 혹은 누군가 나의 옆에 다가오면 잠을 깨는데 매일 밤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자다가 일어나서 “엄마 왔소?”하고 말장난을 친 뒤 다시 잠에 든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해서 형이 내가 잘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거나 아니면 TV를 틀어놓고 TV 바로 앞에서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TV 앞에서 자고 있으면 어머니는 밤 늦게 들어오셔서 날 끌어 안고 침대에 눕혀 주셨다. 이제는 습관처럼 TV를 켜고 잠이 든다. 이제는 형이 군대에 갔다. 그러니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아무도 없다. 익숙해져서 자취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우리 집도 조금은 떠들썩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는 이혼을 해서 혼자서 나와 형을 키운다. 일을 쉬실 때가 아니면 아침, 그리고 밤늦게 이렇게 두 번 밖에 못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매 번 ‘어머니한테 잘 해드려야지, 속 안 썩여야지.’하고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어머니께 화를 낸다. 이 글을 쓰면서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때는 한 침대에서 나와 엄마, 그리고 형이 같이 잤다. 그러면 아버지가 새벽에 들어와 술을 마시고 난리를 치고 그걸 말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매일 듣게 되었다. 이제는 1년에 한 번 정도만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데 아버지는 술을 마신 상태로, 혹은 맨 정신으로도 미안하다고 가끔 하신다. 옛날 일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고 아버지가 엄청 싫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마음을 고쳐먹은 아버지가 싫지만은 않다. 지금은 재혼을 하셨고 매달 꼬박꼬박 돈을 모아 생활비를 보내 주시는데 내 용돈도 함께 보내주신다. 앞으로는 너무 미안해하지 마시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 옛날 보다는 많이 괜찮아졌다고 한다.
이렇게 나에게 ‘문 소리’는 아버지 때문에 공포였고, 어머니 때문에 미안함이었다. 여전히 나는 어머니가 오시면 “아이고, 다녀오셨소 마마.”라고 장난을 친다. 아니면 자는 척을 하다가 벌떡 일어나 깜짝 놀래켜드린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 많이 해서 어머니도 눈치를 채신다.
나중에는 내가 커서 이 시처럼 일을 하고 돌아와서 주무시는 어머니를 내가 내려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예시작품 2
▶ 고른 시
 
물이 수증기로 바뀌는 순간
김승희
 
그 뜨거운 홀연
순간 그 미끄러운 순간
날씨처럼 항상 변하고 있는
천연
어디에도 밑줄을 그을 수 없는
그 순간
아낌없는 순간
죽어도 좋은 순간
 
 
▶ 학생 글
나의 머릿속에 가장 좋은 순간 중 하나는 나의 18번 째 생일 이야기이다. 올해 4월 2일이었다. 토요일이었던 그날은 여자친구와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다.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여자친구를 데리러 갔다. 평소보다는 신경을 써서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점심 때 쯤이 되어서야 만났다. 만나자자마 선물이라며 나에게 향수를 줬다. 받았던 그 향수는 3주 전에 여자친구의 아버님 생신이 있을 때 여자친구가 아버지께 드릴 향수를 고르자고 해서 고른 향수였다. 알고 보니 아빠 생신 선물로 향수를 고르러 간 게 아니라 내 선물을 같이 보러간 것이었다. 놀랐다. 완전 깜짝 선물이었다. 뿌리고 가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뿌렸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다.
여의도 시민공원에 도착했다. 사람은 매우 많았지만 날씨가 정말 좋았다. 공원을 걸으며 경치 구경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파서 먹을 식당을 검색했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 좀 실망했다. 백반집이라도 있나 해서 가고 있었는데 우연히 파스타 집을 발견했다. 냉큼 들어가서 주문을 한 후에 음식이 나와 맛있게 먹었다. 가격은 좀 비쌌지만 정말 맛있었다. 다 먹고 나오니 바로 앞 쪽에도 작은 공원이 하나 있었다. 그렇게 크기 않은 공원이었지만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여섯시쯤 되니 해가 점점 기울어갔다. 다시 한강으로 와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좋았다. 벚꽃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점점 어두워졌고, 우리는 솜사탕을 하나씩 먹었다.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해서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간신히 다 먹었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여자친구가 원래 생일 때 미역국이랑 잡채를 해줄 거라고 스쳐가듯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전날 잠들어서 못했는지 하루 종일 미안하다고 그랬다. 난 정말 괜찮았는데……. 그래도 자기 집에 편지 써 둔 게 있으니 그 거라도 준다고 하길래 집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 후에 여자친구가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나왔다. 안을 열어보라고 해서 열었더니 미역국을 담은 보온병과 잡채가 들어있었다. 너무 놀랐다. 준비 못했다고 하더니, 거짓말이었다. 나는 정말 놀라서 그 자리에서 열고, 먹어보았다. 정말 맛있었다. 게다가 집에 갈 때는 큰 케이크도 사주었다. 향수에 케이크에 음식까지. 모두 받기만해서 미안했다.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데 양손이 무거웠지만 행복해서 무거운 걸 느끼지 못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부모님께 선물을 전부 보여드리고 다같이 케이크를 먹었다.
생각해보면 이날은 만나서부터 끝까지 하락곡선이 없었다. 날씨부터 시작해서 깜짝 선물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어디에도 밑줄을 그을 수 없는 순간, 아낌 없는 순간, 죽어도 좋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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