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개인브랜딩/툴툴툴- 소통

지네에게 바칠 소녀를 고르는 기준

by 인강 2019. 8. 9.
반응형

 

중학교 1학년 국어단원, 지네장터 설화였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편부 가정에 두 눈을 잃은 장애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가난한, 빈민층의 미성년 여자 아이에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돈과 그녀의 목숨을 바꾸는 약속을 하도록 한다. 이것이 온당한 약속인가? 이것은 혹시 어리고 약한 아이에게 ‘강요된 죽음’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죽음을 과연 고결한 효의 완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결국 이 이야기는 전설적인 두꺼비의 사투로 소녀가 목숨을 건지며 끝나지만, 그와 함께 이 이야기는 사람의 양심이란 고작 두꺼비만도 못했다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은 아닌가? 이를테면 대한민국에 닥친 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반에 나로서는 가장 안타까운 상황에 있는 아이의 명단을 넘기라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로서도 쉽지 않은 결론이었다.

 

이 고민을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다. 교실에 들어가 소녀가 자신의 목숨을 팔 것인지 고민하는 부분까지만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상황을 주었다.

 

“너희 10개 모둠은 이 마을의 10개 부족을 대표하는 부족장이다. 지네로부터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해라. 첫째, 돈으로 소녀의 목숨을 사 지네에게 바치고 마을의 안전을 지킨다. 둘째, 마을사람들이 다 죽는다 해도 지네와 싸워 마을을 지킨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좋다. 단, 다른 부족을 설득하기 위해 충분한 이유를 들어야 한다.”

 

발표에 성공한 모둠에게 초코파이와 요구르트의 진상을 약속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와아 하는 작은 함성이 교실을 채웠다.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한 아이들이 더러 맹렬히 토론의 순간을 마주하기도 했다. 모두가 발표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대화에 참여한 것만으로 즐거웠다. 명랑함 속에서 더러 차갑고 단단한 논리로 명료함을 보인 학생들도 있었다. 모두가 그들을 우러러 봤고 나 역시 그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수업은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간단했다. 학생들의 발표에는 진지함이 없었다. 꽤 많은 학생들이 소녀를 제물로 지목했고 그 효율성과 경제성을 강변했다. 그들에게는 아주 쉽고 명확한 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말과 논리가 이 세상에 실현되었을 때 그것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잔혹한 고통으로 돌아갈지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리고 약한 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똑똑한 말들이 교실에 차고 넘쳤다. 그들은 똑똑했지만 똑똑하지 못했다. 그것을 칭찬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나설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선생이고, 저들은 학생이다. 나의 말이 갖는 힘과 권위를 완전히 지우기란 불가능하다. 가장 좋은 상황은 학생들이 서로 겨루는 것이다. 학생들이 서로의 논리와 감정을, 통찰과 성찰을, 공감과 분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런 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수정된 수업기획은 다음과 같다.

1차 토의를 서둘러 마치고, 2차 토의를 시작했다. 다음 상황을 주었다.

 

“소녀를 바치기로 한 모둠은 자기 모둠 중에서 그 소녀를 고르도록 한다. 지네와 싸우기로 한 모둠은 자기 모둠 안에서 먼저 싸움에 나설 사람을 고르도록 한다. 단, 그 이유를 3가지 이상 분명히 밝혀야 한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첫 번째 주제에서 가볍게 답했던 학생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어색해하는 모습이 눈에 띤다. 크게 웃고 떠들기도 했지만, 뭔가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도 보였다. 선택을 하지 못한 모둠도 더러 있었다. 선택을 한 모둠에게 이유를 묻고, 이야기 속의 소녀와 비교하였다. 대개 자신이 군인이 되어 싸우겠다고 한 학생은 자신이 어떤 이유로든 분명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제물이 되겠다고 한 학생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제물이 되어도 좋다고 발표하였다.

 

두 사람을 모두 칭찬하였다.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한 아이들에게는 군인의 필요성과 훌륭한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칭찬하였고, 함께 싸우겠다고 한 아이들에게는 시민의 필요성과 훌륭한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칭찬하였다. 군인이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덕성은 이 공동체를 위해 언제나 자신을 희생할 각오일 것이다. 훌륭한 시민은 더불어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며 그것은 먼저 제 안에 생명력이 넘칠 때 가능할 것이다. 이 아이들은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러한 이들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무실로 돌아와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다 욕심이 났다. 이 옛이야기의 고민을 현실로 이어간다면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 소수자를 재물로 바치는 실제 이야기를 찾았다. 주로 활용하는 EBS 지식채널을 검색했더니 영상이 나왔다.

<여섯명의 시민들>이라는 영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 시기, 영국에게 함락된 칼레라는 프랑스의 한 도시에서는 항복의 조건으로 여섯 명의 시민이 죽어야 한다는 최후통첩을 받는다. 누가 죽을 것인가? 이 때 먼저 나선 노인은 칼레시의 가장 큰 부자였다. 용감한 칼레의 시민이여 나를 따르라는 그의 말에 하나 둘 나선 사람들은 칼레시의 가장 유명한 행정가, 상인, 교수, 그리고 철학과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처형장으로 간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함께 나눈 옛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왜 이들은 이런 선택을 하였을까? 왜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 지금 다시 선택을 한다면 어떠한 선택이 우리에게 옳은 것일까?

 

5분의 생각할 시간과 10분의 토론시간, 추가시간으로 5분을 더 주었다. 그렇게 선택의 상황으로 학생들을 밀어 넣었다. 학생들이 진지하게 고뇌하기 시작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