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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섭- 반대로 말해야만 전할 수 있는 마음- 김소월.진달래꽃.수업연구

by 인강 201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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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이 이별을 축복하는 시라고? 산화공덕이라니..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이 시를 그렇게 말한 사람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1. 잘 들어. 역겨우면 가라는 거야, 역겨우면!!

내 마음에 내내 걸린 시구는 이것이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그러니까 이 구절은, 당신이 나를 떠나 가실 때, 그것도 떠나는 이유가 당신이 나를 보는 것이 역겨운 정도가 되어서 도저히 나를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 그런 때가 와야만 당신을 보내주겠다는 이야기, 지금은 아닌 그 때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래형이며 가정형이다. 그러니까 이 말에는 지금은 당신이 나를 떠날 뜻이 없다는 믿음과 지금은 너무도 당연히, 당신이 나를 역겨워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말은 미래형이며 가정형이다. 그러므로 이 말의 진짜 뜻은, 언젠가 당신이 나를 지금처럼 사랑하지 않는다해도, 그래서 나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도, 당신이 나를 떠나고 싶은 이유가 역겨움이 아니라면, 당신이 나를 보는 것이 역겨운 정도가 되어서 도저히 나를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면, 부디, 제발, 나를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2. 잘 들어. 내 사랑을 밟고 가라는 거야, 정말 그럴 수 있어??

그래도 정말 당신이 나를 떠나고 싶다면, 정말 내가 당신에게 역겨울 정도로 혐오스러워져서 당신이 정녕 나를 떠나겠다는 마음이 분명해진다면, 그 때는 내가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 피처럼 붉은 빛으로 유명한 그 진달래꽃, 내 피이며 내 사랑 같은 그 꽃을 당신 앞에 하나하나 뿌려 놓겠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나를 떠나려거든, 내 피이며 내 사랑 같은 그 꽃을 하나하나 밟고 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언젠가 당신이 나를 지금처럼 사랑하지 않는다해도, 그래서 나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도, 당신이 나를 보는 것이 역겨운 정도가 되어서 도저히 나를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정도가 되었다 해도, 당신은 절대 그 꽃을 밟을 수 없으리라는 기대, 당신이 절대 그 꽃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기원, 내 피이며 내 사랑이며 우리의 추억같은 그 꽃을 당신은 절대 하나하나 밟을 수 없으리라는 믿음,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나를 떠나겠다는 연인에게 갈테면 가라고 한 뒤 그동안 서로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며 기념이며 선물들을 늘어 놓고

그것을 다 밟고, 부시고, 찢고 가라는 것이 아닌가 

 

3. 제발 잘 들어줘, 그러니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말하는 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말하는 이의 떠나라는 말에 담긴 진짜 마음은, 당신이여 부디 나를 떠나지 말라는 것. 그 꽃을 당신은 절대 밟을 수 없으리라는 것, 그래서 당신은 절대, 당신은 부디 나를 떠나지 말라는 것. 나를 떠나라고 했지만 제발 나를 떠나지 말라는, 마지막까지 님을 잡고 싶은 그 마음이 아닌가... 반어, 반어, 반어. 그러므로 이 시는 모두 반어이다. 반대로 말해야만 전할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이 세상에는 있다. 

 

1학년 국어과 수업공부 시간에 이 시로 논의를 했다. 선생님 3분과 함께 반어와 역설 사이에 많은 말들을 나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협의 후에 강의안을 만들다가 자료검색을 했다.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만났다. 처음보는 글이었는데 우리가 논의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품고 있었다. 놀랍고 재밌었다. 

 

 

4. 왜 4연만 반어인데? 왜? 1,2,3연은 왜 안돼?

진달래꽃을 반어에 근거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동료샘이 계셨다. 온갖 참고서, 자료집, 심지어 교사용 지도서에까지 진달래꽃은 반어가 아니었다. 순종과 순응의 시, 고결한 희생의 시, 님의 떠남을 꽃을 뿌리며 축복하는 극한의 받아들임이라는 것. 그들은 모두 마지막 4연만을 반어로 인정했다. 대개 '죽어도'라는 시어가 근거.

 

여기서 분명히 정리할 것은 반어를 판단하는 근거이다. 반어는 일상적인 표현과 분명히 다르다. 반어를 반어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개 반어 이전에 감정을 표현하는 강력한 부분이 있다. 집에 돌아온 아이를 보며 아빠가 잘 했어 하는 것과 다리가 부러져 집에 돌아온 아이를 보며 아빠가 잘 했어 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같은 잘 했어 이지만,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는 소리의 억양과 어조와 표정과 크기 시에서도 마찬가지. 

 

대개의 반어는 강력한 감정표현과 함께 한다. 그것이 없다면 반어를 반어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어도'라는 표현 외에 진달래꽃에서 강한 감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부분, 강조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없는가? 그것을 근거로 각 연을 반어로 볼 수는 없는가?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제시한 토론 주제는 다음과 같다.

 

반어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진달래꽃>의 1-4연 중 반어로 해석이 가능한 연을 고르고 그 근거를 시 안에서 찾아 논술하시오......

 

재밌는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진달래꽃의 화자가 보인 태도를 이별을 수용하는 것으로도, 이별을 거부하는 것으로도 해석했다. 1,3,4연에 있는 강력한 감점표현법을 근거로 반어로 주장도 했다. 

 

그러나 모두 동의한 것은 이 시가, 강력한 사랑의 시라는 것. 그 논의를 거쳐 이 시가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강렬함에 모두 동의해 주었다는 것이 좋았다. 

 

 

5. 왜 순응하고 순종하는 건 여성이야? 왜?

또 좋았던 것은 화자의 성정체성에 대한 논의. 우리학교가 선택한 교과서에는 진달래꽃을 '여/성/화/자'라고 단정했다. 무지하고 무례한 일이다. 이 시의 어느 부분을 봐도 이 시의 화자를 여성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수용하고 희생하며 순응하고 순종하는 것은 모두 여성인가? 여성이어야 하는가? 반어와 역설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해설도 안타까웠지만 반어를 4연에만 적용하는 근거와 이유를 찾을 수 없던 것도 안타까웠지만 수용하고 희생하며 순응하고 순종하는 것은 여성으로 단정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무지하고 무례하게 느껴졌다. 교과서를 만드시는 분들의 노고를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부디 다음 교과서에서는 이 부분이 충분히 논의되어 수정되었으면 좋겠다.

 

문학에 정답은 없지만, 좀 더 정확한 대답은 있다고 믿는다.

 

이 수업을 준비하다 우연히 찾은 이어령 선생님의 글 전문을 옮긴다.

부디 여러 국어샘들이 즐거운 시수업을 하시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참고자료.

국어수업 블로그 : https://dasidasi.tistory.com/entry/새학기-교사가-시간을-버는-수업 [교사가 지치지 않는 수업]

국어시간 소설 수업 : https://page.kakao.com/viewer?productId=56043622 [독서토론수업 소설 : 미지의 빨간약]

국어시간 영화 수업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5727277 [영화수업 안내서 : 국어시간에 영화읽기]

국어시간 온라인 수업 :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2165869 [온라인 국어수업 안내서 : 우리들의 랜선 독서수업]

국어시간 온라인 수필 : https://brunch.co.kr/@kkamjangee/164 [브런치 모바일 수필수업 우수작 모음 : 영종essay 실명으로 해도 되요]

국어시간 온라인 소설 : https://novel.naver.com/challenge/list?novelId=768987 [네이버 웹소설 창작수업 우수작 모음 : 김요한 이야기]

기운나는 노래 한 곡 : https://youtu.be/LJTyTUzE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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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시.그러나 가장 잘못 읽혀져 온 시-그것이 바로 김소월의「진달래꽃」이다.거의 모든 사람들은「진달래꽃」이 이별을 노래한 시라고만 생각해왔으며 심지어는 대학입시 국어 문제에서도 그렇게 써야만 정답이 되었다.하지만「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  우리다」라는 그 첫행 하나만 조심스럽게 읽어봐도 그것이 결코 이별만을 노래한 단순한 시가 아니라는  것을 간단히 알 수가 있다.왜냐하면「가실 때에는…」「…드리우리다」와 같은 말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듯이 이 시는 미래 추정형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영문 같았으면「If」로 시작되는 가정법과  의지 미래형으로 서술되었을 문장이다.이 시 전체의 서술어는「…드리우리다」「…뿌리우리다」「…옵소서」「…흘리우리다」로 전문에 모두 의지나 바람을 나타내는 미래의 시제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 의미로 보면 지금 님은 자기를 역겨워하지도 않으며 떠난 것도 아니다.오히려  그들은 지금 이별은커녕 열렬히 사랑을 하고 있는 중임을 알 수가 있다.그런데도 이 시를 한국 이별가의 전형으로 읽어온 것은 미래추정형으로 된「진달래꽃」의 시제를 무시하고 그것을 현재나 과거형으로  진술한 이별가와 동일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고려때의 가요「가시리」에서 시작하여「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는「아리랑」의 민요에 이르기까지 이별을 노래한 한국시들은 백이면 백 이별의 그 정황을 과거형이나 현재형으로 진술해왔다.오직 김소월의「진달래꽃」만이 이별의 시제가 미래추정형으로 되어 있고 시 전체가「만약」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해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꽃」의 시적 의미를 결정짓는 것.그리고 그것이 다른 시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이같은 시의 시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가령 미래추정형의 시제를 실제 일어났던 과거형으로 바꿔서「나보기가 역겨워 가신 그대를 말없이 고이 보내 드렸었지요」로 고쳐보면 어떻   

 

게 될 것인가.그것은 이미 소월의 진달래꽃과는 전혀 다른 시가 되고 말 것이다.그렇기 때문에「진달래꽃」을 이별의 노래라고 생각한다는 것은「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은…」이라는 옛가요를 듣고 그것이 백만장자의 노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시 음치에 속하는 일이다.그같은 오독이「진달래꽃」을  읽는 시의 재미와 그 창조적인 의미를 얼마나 무참히 파괴해버렸는가는 췌언할 필요가 없다.그러한  오독으로 인해서「고이보내 드리 우리다」나「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 같은 시의 역설이 한국  여인의 부덕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이 시를 명심보감이나 양반집 내훈의 대역에 오르도록 했다.

 

자기를 역겹다고 버린 님을 원망은커녕 꽃까지 뿌려주겠다는 인심좋은 한국 여인의 관용이,그리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겠다는 극기의 그 여인상이「진달래꽃」의 메시지였다면 그 시는 물론이고「진달래꽃」의 이미지조차도 우스워진다.그렇다.그런 메시지에 어울리는 꽃이라면 그것은 저 유교적 이념의  등록상표인「국화」요「매화」일 것이다.

 

「진달래꽃」은 결코 점잖은 꽃,자기 억제의 꽃이라고는 할 수 없다.그것은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진 가축화한 완상용 꽃이 아니다.오히려 겨우내내 야산의 어느 바위틈이나 벼랑가에 숨어 있다가 봄과  함께 분출한 춘정을 주체할 바 모르는 야속(野屬)의 꽃인 것이다.더구나 영변 약산에 피는 진달래꽃은  그 색깔이 짙기로 이름나 있다.온 산 전체를 온통 불태우는 꽃으로, 신윤복의 그림「연소 답청」에서  보듯 남자들과 나귀 타고 산행을 하는 기녀들의 머리에 꽂았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인 것이다.그런  진달래가 이별의 슬픔을 억제하고 너그러운 부덕을 상징하는 자리에 등장하는 꽃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유교사회에 있어 진달래꽃은 그 흔한 화조병풍이나 화투장에서마저도 멀찌감치 물러나 앉은  반문화적 꽃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째서「진달래꽃」이 어둡고 청승맞은 4.4조의 우수율이 아니라 밝고 경쾌하며 조금은 까불까불한 느낌조차 주는 7.5조의 기수율로 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그것은 이별가의 침통한 가락이 아니다.약간은 수줍게 그러면서도 철없이 불타오르는「진달래꽃」같은 사랑의 언어들, 때로는 장난기마저 깃든 천진난만한「소녀의 기도」소리의 율동을 들을 수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밤의 어둠을 바탕으로 삼지 않고서는 별빛의 영롱함을 그려낼 수 없듯이 이별의 슬픔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사랑의 기쁨을 가시화할 수 없는 역설로 빚어진 것이 바로 소월의「진달래꽃」인 것이다.즉 이별의 가정을 통해 현재의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 시이다.이별을 이별로써 노래하거나 사랑을 사랑으로 노래하는 평면적 의미와 달리 소월은 사랑의 시점에서 이별을 노래하는 겹시각을 통해서 언어의 복합적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라는 대립된 정서,대립된 시간 그리고 대립된 상황을 이른바「반대의  일치」라는 역설의 시학으로 함께 묶어 놓는다.그래서 사랑을 반기고 맞이하는 꽃이 여기에서는 반대로 이별의 객관적 상관물이 되고,향기를 맡고 머리에 꽂는 꽃의 상부적 이미지가 돌이나 흙과 같이  바닥에 깔리거나 발에 밟히는 하부적 이미지로 바뀐다.그러한 꽃의 이미지 때문에 가벼움을 나타내는  「사뿐히」와 무거움을 나타내는「밟다」라는 서로 모순하는 어휘가 하나로 결합하여「사뿐히 즈려밟고」의 당착어법이 되기도 한다.

소월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산에 핀 진달래거나 혹은 여인의 머리나 나무꾼의 지게에 꽂아진 진달래의 그 아름다움밖에는 모를 뻔했다.그러나 반대의 것을 서로 결합시키는 소월의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바위 틈에서 피어나는 진달래만이 아니라 슬픈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밟히우면서 동시에  희열로 피어나는 또 다른 가상공간의 진달래꽃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그것이 바로 이별의 슬픔을 통해서 사랑의 기쁨을 가시화하는 역설 또는 아이러니라는 시적 장치이다.그렇게 해서 얻어진 시의 복합적 의미는 반드시 한 항목만을 골라 동그라미를 쳐야 하는 사지선다의 객관식 답안지로는 영원히 도달될 수 없는 세계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의 마지막 구절을 눈여겨 보면 산문과는 달리 복합적 구조를 가진  시적 아이러니가 무엇인지를 알게될 것이다.어느 평자도 지적한 적이 있지만 산문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우리다」는 조금도 뜻이 다를 것이 없다.그러나 부정을 뜻하는「아니」가「눈물」앞에 오느냐 뒤에 오느냐로 시적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아니가 뒤에 올 때에는 단순히 평서문으로서 그냥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진술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하지만 아니가 눈물 앞에 올 때에는 그 부정의 의미가 훨씬 강력해진다.「아니」라는 말이 의도적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강력한 부정일수록 긍정으로 들리는 시의 역설이 생겨나게 된다.

 

김소월의「진달래꽃」은 한 세기 가까이 긴 세월을 두고 오독되어온 셈이다.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이별의 노래가 아니다.역겨움과 떠남이 미래형으로 서술되고 있는 한「사랑」은 언제나「지금」인 것이다.사랑을 현재형으로,이별을 미래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소월의 특이한 시적 시제 속에서는 언제나 이별은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랑의 기쁨과 열정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구실을 한다.그러한 모순과 역설의 이중적 정서를 가시화하면 봄마다 약산 전체를 불타오르게 하는, 그러면서도 바위틈 사이에서 하나 하나 외롭게 피어나는 진달래꽃잎이 될 것이다.<이어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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